제일은행장 대출 비리, 빙산의 일각인가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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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은행장 구속 후 수사 확대…금융·정치권으로 파장 번질 조짐

김영삼 정권 때 사법 처리된 많은 유명 인사가 그렇듯, 이철수 제일은행장의 ‘불운’도 진정서 한 장에서 비롯되었다.

지난해 4월께 제일은행 내부 관계자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진정서가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비롯한 관계기관에 뿌려졌다. 이철수 제일은행장이 경영난을 겪고 있는 효산그룹에 무리하게 대출을 강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진정서에서 효산그룹이 제일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불요불급하게 돈을 쓴 대표적인 예로 지적된 것은 효산그룹의 리버사이드호텔 인수건이었다. 92년 4월 부도를 내 경매에 부쳐졌던 서울 서초구 잠원동 소재 리버사이드호텔은 지난 94년 4월 동림CUBR(대표 김규장)에 넘어갔다. 여러 차례 유찰된 끝에 당초 감정가 6백6억원에 턱없이 못미치는 2백40억원에 낙찰된 것이다. 동림CUBR는 효산그룹 계열 효산종합개발의 계열사. 14개 계열사로 이루어진 효산그룹은 리버사이드호텔을 무리하게 인수하면서 자금난에 빠져 이 해 11월 부도 처리되고 말았다.

제일은행 이어 서울은행도 부실 대출

진정서를 본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요청으로 은행감독원이 제일은행의 효산그룹 대출건에 대한 특별 검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은감원은 이 건을 곧이어 있을 정기 감사 기간에 다루기로 결정하고 특검을 일시 중단했다. 효산그룹에 대한 특검 과정에서 은감원은 서울은행 역시 효산그룹이 담보가 부족하거나 여신이 금지된 업종에 투자를 하는데도 대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발하고 ‘주의 촉구’ 조처를 취했다. 은감원은 다시 6월 정기 감사 기간에 제일은행에 대해 ‘기관 경고’를 내렸다.

은감원이 의도적으로 이 건을 축소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혹이 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두 은행에 대해 비교적 가벼운 징계 조처로 일관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정부의 한 소식통은 “같은 달 지자제 선거가 예정돼 있어서 정부로선 사안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은감원의 축소 의혹에 대한 검찰의 조사는 부질없어 보인다).

효산그룹에 대한 제일은행의 대출건이 다시 불거진 것은 올해 3월 장학로 전 청와대 제1 부속실장의 부정 축재 의혹 사건이 터져나온 때였다. 수사를 담당한 서울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황성진)는 장학로씨가 94년 7월 효산그룹의 장장손 회장으로부터 대출 청탁을 받고 세 차례에 걸쳐 6천만원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야당측은 효산그룹이 경기도 남양주시에 콘도(서울스키리조트 시설의 일부) 건설 허가를 따낸 시점이 장학로씨에게 돈을 건넨 시점과 맞아떨어진다는 점을 들어, 장씨를 외압의 배후 인물로 지목하기도 했다.
부당 대출 배후 세력에 정치권 인사 들먹

금융계에서는 은감원 특검 이후 이철수 제일은행장에 대한 내사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정작 검찰의 내사가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대출 비리 사건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비리 있는 곳에 수사 있다’는 것이 검찰의 공식 입장이기는 하지만, 기획 수사를 전담하는 대검 중수부(검사장 안강민)가 왜 하필 이때 손을 댔느냐 하는 것이다.

금융계에서는 이행장이 우성그룹 인수자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 결정을 둘러싸고 채권단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그와 정부 간에 묘한 알력이 생겼다고 보는 시각이다. 제일은행은 우성그룹 처리 문제와 관련해 덩지가 큰 인수자를 선호해온 반면 정부는 또 다른 정치적 고려를 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말 그대로 해석일 뿐, 사실 관계가 확인될 성질이 아니다. 그보다는 검찰이 이때쯤 진정서에서 비롯한 대출 비리에 관해 구체적인 증거들을 포착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검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지난 4월30일 이철수 제일은행장이 전격 구속된 후 검찰 수사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어 왔다. 이철수 행장 개인의 대출 비리에 관한 것이 그 하나요, 효산그룹의 대출 비리에 관한 것이 둘째다. 이행장의 개인 비리 차원에서 밝혀진 것은 효산그룹의 서울스키리조트와 (주)금강슈페리어에 대한 대출 사례금조로 현금 1억원을 받았다는 것 정도다. 검찰은 또 우성그룹에 대한 대출 과정에서도 대출 커미션을 받은 것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다.

검찰 수사의 무게 중심은 이행장의 개인 비리에서 효산그룹의 대출 관련 비리로 옮겨간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렇게 되면 효산그룹에 부당하게 대출해준 금융기관이 더 많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이미 서울은행·고려증권·중앙리스가 검찰 조사를 받았거나 받을 예정이다. 이들 역시 제일은행처럼 담보 가치에 비해 훨씬 많은 금액을 빌려주었거나 여신이 금지된 업종의 기업에 대출해준 경우다.

문제는 왜 금융기관들이 쓰러져가는 그룹에 그토록 많은 대출을 해주었느냐 하는 것이다. 단순히 대출 커미션을 받는 대가로 그랬다고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는 의혹이 일고 있는 것이다. 평상시 효산그룹 장장손 회장이 회사의 경영 일선에는 명목상의 인물들을 앉혀놓고 자신은 사채시장에 깊숙이 개입해 왔으며, 정치권의 비호를 받는 것처럼 행세해 왔다는 점이 이런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현재 검찰은 효산그룹 각 계열사와 그룹 경영진 명의의 계좌를 추적하고 있다. 효산그룹 내부에 조성된 비자금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 추적함으로써 이 그룹에 부당 대출하게 한 배후 세력을 밝히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검찰 주변에서는 전·현직 관료나 정치권 인사들의 이름도 오르내리고 있으나, 검찰 수사에서 실제로 물증이 포착될지 여부는 속단하기 어렵다. 대출 비리 문제로 정치권까지 들먹거려지는, 그래서 우리 금융 시장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여준 이번 사건이 일과성으로 끝날지 아니면 일파만파로 번질지는 계좌 추적 작업 결과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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