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언’은 일본 우익화의 징표
  • 卞昌燮 기자 ()
  • 승인 1995.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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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 사임은 사죄와 무관…병든 역사관 민족주의로 착각, 식민 지배 시대 ‘향수’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는 자선 활동 기간이었다’는 해괴한 망언으로 외교적 파문을 일으켰던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일본 총무처장관이 13일 저녁 자진 사임함으로써 급속히 냉각되던 한·일 관계는 일단 한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우리 외무부의 한 당국자가 ‘에토 장관의 사임으로 과거사 파문이 일단락됐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고 했듯이, 이번 사건과 관련한 일본과의 과거사 대결 국면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에토는 무라야마 총리에게서‘엄중 주의’조처를 받고난 뒤에도 끝까지 자리를 고수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파문이 날로 확산되면서 야당인 신진당이 마침내 에토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자민당과 함께 연립 여당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당 및 사키가케의 최고위층이 에토에게 자진 사임을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야당 압력+경제적 계산’ 결과

에토의 사임에는 대외적 요인도 작용했다. 일본은 오사카에서 열리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의 의장국으로서, 쌀수입 개방의 예외 규정 등 중요한 사안에 대해 한국에 협조를 구해야 할 처지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18일로 예정된 한·일 정상회담이 취소될 경우 일본의 전략은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말하자면 국내적으로는 신진당 등 야당의 거센 압력에 밀리고, 대외적으로는 아·태경제협력회의를 성공적으로 매듭지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일본 정부가 일단 발등의 불부터 꺼야 되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에토의 사임을 극구 반대했던 연립 정권 내의 자민당 세력, 그중에서도 가토 고이치 간사장의 행보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머지 않아 무라야마 총리를 제치고 총리에 기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가토 간사장은, 에토의 사임을 앞장서 가로막은 장본인이다. 따라서 그의 일파가 자민당내 최대 계파를 장악하고 있는 한 앞으로도 일제의 식민 지배에 관한 망언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들어서도 오쿠노 세이스케 법무장관, 와타나베 미치오 전 외무장관, 시마무라 요시노부 문부장관 등 일제의 식민 지배와 관련해 망언을 퍼부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과거 집권당인 자민당 소속이다. 이들 대부분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경험했기 때문에 옛날에 대한‘향수’마저 느끼고 있는 전전(戰前) 세대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오도된 역사관을 마치 민족주의인 양 착각하고 있다.

이들의 발언은 근래 일본 사회 전체가 급속히 보수 우익화하고 있는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올해 일본이 2차대전 패망 50주년을 맞이해 전쟁을 미화하고 식민지 지배를 당위시하는 발언들이 지도급 인사들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범 죄책감 씻고 당당하게”

일본에서 10여 년째 정치 평론가로 활동하는 한 한국인은 “이런 망언을 하는 이들의 사고 밑바탕에는 올해로 일본이 전후 50주년을 맞이해 독자적인 역사 인식을 갖고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즉, 일본이 종전 50주년을 계기로 전쟁 범죄자·패배자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당당한 역사관을 가지고 국제 사회에서 새출발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본이 얼마 전부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나, 최근 오키나와 기지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미·일 안보조약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도 모두 그들의‘홀로서기’정책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우리 정부는 과거의 무른 태도에서 벗어나 이번 망언 파문만큼은 해당 각료에 대한 해임 요구라는,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끼리는 전례가 없는 초강경수로 맞섰다. 정부가 초강경 입장을 고수한 것은 사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측에 경종을 울렸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차제에 양국 외무장관 또는 정상회담을 통해 한·일 기본조약 해석 문제, 나아가 한일합병의 적법성 여부에 대한 본격적인 협의를 진행시켜야 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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