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에 반전 거듭한 미·북한 고위급 회담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8.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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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 일괄 타결 앞두고 ‘변수’ 속출… 미 의회에 발목 잡혀
이번 미·북한 고위급 회담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한편의 드라마였다. 지난 8월21일부터 뉴욕에서 열린 회담은 회담 당일부터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협상에 정통한 한 미국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21일 북한측 대표 한 사람이 “오늘 협상을 끝낼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번 뉴욕 협상에 임하는 북한측 대표에게는 협상 타결에 대한 의지 같은 것이 엿보였다고 한다. 당시 북한측 협상단은 9월5일 김정일의 국방위원장 재추대를 앞두고 뉴욕으로부터 무언가 ‘선물’을 가져가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측은 이번 협상 내내 종전과 달리 너무 솔직하게 나와 미국측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워싱턴에 온 김계관측과의 비공개 회동에 참석했던 한 미국 인사에 따르면, 양측은 이번 회담에서 4자 회담, 미사일, 미군 실종자, 미국의 잉여 밀 제공을 포함한 경제 제재 완화, 북한의 지하 시설에 대한 사찰 등 거의 모든 현안을 꺼내놓고 일괄 타결하기로 거의 합의를 이루었다. 북한측도 바로 이같은 분위기 탓에 8월31일 또는 9월1일에는 합의 사항을 발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이다. 특히 타결안 가운데는 빠르면 오는 11월 미·북한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31일 협상 분위기가 반전했다. 당일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문제의 미국 외교 소식통은 ‘미사일(인공 위성) 발사’ 소식을 계기로 미국측 협상단이 강경으로 돌아서, 그 날 회담에서 북한측을 추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한측 대표단은 협상에 불참했다. 이 외교 소식통은 미국측 관계자로부터 ‘김계관 수석대표조차 미사일 발사 소식에 깜깜해 매우 당혹스러워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외교부 소속인 김수석대표가 미사일 문제에 관해 본국 정부의 위임 사항을 받아놓은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협상 당일 불참한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본국 정부의 지시를 기다리는 동안 김수석대표는 귀국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미국과의 협상 타결을 우기며 뉴욕에서 버틴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 “하루빨리 타결하는 게 유리”

그런 그에게 다시 미국과 협상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은 지난 1일 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날 협상은 속개되지 못했다. 이번에는 미국측 발등에 불똥이 튀었기 때문이다. 바로 2일 미국 상원 본회의는 북한 핵 의혹에 관한 회의를 열고 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었다. 미국측 수석대표인 찰스 카트먼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는 상원 본회의에 출석해 북한에 중유를 지원할 재원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결의안을 저지하려고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결의안은 94년 미·북한 제네바 핵합의를 한순간에 침몰시킬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지였다.

이처럼 의회의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 못지않게 북한측도 상당한 압박감을 느낀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북한도 미국 의회의 강경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당초 미국과 뉴욕 회담에서 거의 합의한 것으로 알려진 일괄 타결안을 하루빨리 매듭짓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어찌 보면 미국만큼 북한도 초조감에 휩싸여 있는 듯하다는 것이 워싱턴 한반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북한이 최근 대내외에 과시하려던 인공 위성 발사 실험이 결과적으로 미국 정계에 ‘안보 위협론’을 부추켜 역효과만을 가져온 상황에서, 북한의 대미 협상 반경이 그만큼 좁아지지 않았겠느냐는 견해도 있다. 또 협상을 통해 아무 것도 못 얻느니 ‘반쪽 빵’이라도 얻어내는 것이 유리했다고 판단했을 성싶다.

특히 앞으로 정권 생존의 일정 부분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 여하에 달려 있다고 보는 북한으로서는, 이번 미·북한 고위급 회담뿐 아니라 앞으로 열릴 미사일 회담 등을 위해서도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리라는 것이 이곳 워싱턴 한반도 전문가들의 풀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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