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방 위원장 취임으로 '정규군 국가'완성
  • 南文熙 기자 ()
  • 승인 1998.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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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국방위원회, 최고 기관으로 ‘권력 이동’
미국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는 19세기 인도네시아의 발리 왕국에 대한 분석에서 유명한 ‘극장 국가론’을 펼쳤다. 발리 왕국에서 국왕은 드라마의 주연으로, 신하들은 조연으로 그리고 국민은 관객으로 등장하며, 통치 행위는 잘 짜인 대본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전문가들 중에는 북한을 이 극장국가론에 입각해 분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이가 일본 도쿄 대학 명예교수이자 저명한 한반도 전문가인 와다 하루키 교수이다.

와다 교수는 60년대 후반에서 현재까지 북한을 극장 국가라는 개념으로 분석한다. 와다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6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북한을 특징짓는 개념은 ‘유격대 국가론’이었다.

유격대 국가는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가 시작된 67년 6월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부터 72년의 헌법 개정 기간 사이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생산도 학습도 항일 유격대 식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유격대 국가론에서 북한이라는 국가 체제는, 수령인 김일성에 의해 영도되는 확대된 항일 유격 부대였고, 북한 주민은 유격대 전사였던 셈이다.

‘유격대 식으로’라는 슬로건을 직접 창안한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후 자기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 그 시발은 95년 10월 8일 단행된 군부 인사였다. 당시 인사의 특징은 조명록 이하일 김영춘 등 항일 유격대 출신이 아닌 정규군 출신의 대대적 승진이었다. 이 군부 인사를 시작으로 유격대를 상징하던 슬로건들이 퇴색하고, ‘혁명적 군인 정신으로 살고 싸우자’는 등의 정규군 슬로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와다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국가 이미지 이동은 금년의 건국 기념일에 정규군을 대대적으로 강조하는 슬로건이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내부적으로 완성되었다.

지난 9월5일의 최고인민회의 결정은 와다 교수의 분석대로라면 바로 정규군 국가 체제가 완성되었음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이날 예상을 깨고 김정일이 국가 주석이 아닌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국방위원장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이며 국방위원회가 실질적인 최고 권력기관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와다 교수의 논법대로라면 그동안 북한 내부에서 진행되어 온 정규군 국가 체제가 이제 대외적 형식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정규군 국가인 북한에서 국방위원장인 김정일은 그 스스로가 북한이라는 극장 국가의 연출자이자 주연인 셈이다. 또 정규군 국가에서 김정일을 보좌하는 핵심 조연은 당 중앙위가 아닌 국방위원회의 장군들이 맡게 된다.

벼랑끝 외교 재연 가능성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번 최고인민회의 개최 전까지만 해도 북한측 인사들 스스로도 김정일이 국가 주석에 추대될 것이라고 누차 암시해 왔는데 왜 갑자기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사실 국가 주석 승계에 대한 김정일의 애초 복안은 이번에 결정된 대로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남겨 두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96년 하반기에는 주석을 수반으로 하는 정무원 체제를 폐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의 이같은 생각은 지난해 11월 김영남 전 외교부장이 외국 대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등 국가를 대표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던 데서도 나타났다.

주석 승계론이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지난해 12월 말 이후였다. 그 계기는 북한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국가 주석 자리가 공석으로 남거나, 김정일이 아닌 다른 인물이 그 역할을 수행할 경우 대외 개방이나 국제 무대에서의 활동에 문제가 생긴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주석 승계론의 명분을 퇴색시키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주석 승계의 가장 큰 필요성이었던 북한과 한·미·일 관계가 기대한 만큼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적인 얼굴 마담 역할을 굳이 김정일이 맡을 이유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김영남 외교부장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임명해, 그에게 대외적인 역할을 맡긴다는 지난해 11월의 구도가 되살아난 것이다.

이런 상황 변화로 유추해 보면 북한이 국제 정세를 결코 낙관적으로 보지 않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외교 활동 강화나 대외 개방 확대보다는 최근의 인공 위성 발사 논란에서 보듯 군사력을 앞세운 벼랑 끝 외교가 재연될 가능성이 우려된다.

유격대 국가·정규군 국가와 대치되는 것이 바로 보통 국가·정상 국가이다. 북한의 현실에서 보통 국가는 최고 권력자인 김정일이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 주석 자리에 앉는 것이다. 북한이 앞으로 국제 사회에 보통 국가로 등장할 수 있을지 여부는 한·미·일 등 주변 국가의 대응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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