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차관급 회담 '탁자밑 협상' 있었다?
  • 南文熙 기자 ()
  • 승인 1998.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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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 결렬 뒤 민간 교류 활성화 ‘기현상’…중요 관심사 깊이 논의한 듯
참으로 이상한 회담이었다. 결과로만 따지면 분명 실패한 회담이었으나 대표들의 표정이 그리 어둡지 않았다. 또 회담이 결렬된 뒤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며 관계를 악화시켰던 그동안의 행태도 재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관계 개선의 발길이 부산하게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월11∼18일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남북 차관급 회담에 대해 언론들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일부 전문가들은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언론은 정부가 상호주의 원칙을 끝까지 고수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남북 관계에 전향적 입장을 가진 일부 전문가는 정부가 첫 만남에서부터 북한을 지나치게 압박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두 평가 모두 회담 직후 최근까지 남북 쌍방에 전개되고 있는 활발한 교류 움직임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미흡하다. 김정일 총비서는 공교롭게도 차관급 회담이 결렬된 4월18일 ‘남북조선 정당 사회 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50돌 기념식에 남북 관계 개선을 강하게 희망하는 듯한 서한을 보냈다.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을 이룩하자’는 제목의 이 서한에서 김정일은 △민족 자주 원칙 △애국 애족 단결 △북남 관계 개선 △외세 지배와 반통일 세력 반대 투쟁 △온 민족의 접촉·대화·연대·연합 강화를 ‘민족 대단결 5대 원칙’으로 제시했다. 김정일은 특히 이 서한에서 ‘남조선 당국자들이 진정으로 애국 애족의 입장, 연북 단합의 입장에 선다면 그들과 민족의 운명을 함께 개척해 나가겠다’고 함으로써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밝혔다.

‘비록 회담은 결렬되었지만 정경 분리 원칙에 의한 남북 대화는 계속하겠다.’ 회담 결렬 직후 이같은 입장을 보인 한국 정부 측도 그 이후 약속을 지켰다. 대표적인 것이 4월30일 발표된 남북 경협 활성화 조처이다. 94년 제네바 핵 회담 이후 정부 차원으로는 두 번째인 이번 경협 활성화 조처에서 정부는 △대기업 총수·경제 단체장의 방북 전면 허용 △대북 투자 제한 완전 폐지 △대북 투자 제한 업종의 네거티브 리스트화 △생산 설비 대북 반출 제한 폐지 등 대담한 구상을 선보였다.

또한 이를 전후로 해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도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미 리틀엔젤스 공연단이 평양 공연을 시작했고,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방북이 5월10일을 전후로 해 이루어질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국민회의의 남궁진·장영달 의원과 한나라당의 김형오 의원이 4월19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 공동 사진전에 참석하기 위해 방북할 예정이다. 지난 5월2일에는 이병웅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이 대북 구호물자 수송 선박에 동승해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최근 전개되고 있는 남북 쌍방의 활발한 움직임을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이는 지난번 베이징 회담과는 별개의 움직임인가.

그러나 베이징 회담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는 표면적 이슈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남북 대표가 1주일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과연 비료와 이산가족 문제만을 논의했을까 하는 의문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한정하기에는 1주일은 너무 긴 시간이다.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공동의 관심사에 대한 논의도 있었을 터인데, 바로 이 점에 지난 회담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DJ의 전향적 대북 정책 인정

그 대략의 내용도 짐작할 수 있다. 즉 DJ 정부 출범을 전후해 북한이 가장 궁금해 했던 점이 무엇인가를 짚어 보면 될 것이다. 그동안 북한이 가장 알고 싶어한 것은 정부가 국내외 역풍에 맞서 그동안 표방해 온 전향적 대북 정책을 관철할 의지와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였다. 김정일 총비서의 4·18 서한은 이런 의문들에 대해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들었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암시한다.

다음은 한국 정부 입장이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정부로서는 지난 회담에서 20만t에 이르는 대북 비료 지원을 타결짓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따라서 베이징 회담에서는 큰 틀의 의지만을 제시하고 실질적 지원은 민간 차원에서 하겠다는 이중 전략을 구사했을 법하다. 때문에 최근의 경협 활성화 조처와 민간 차원의 방북 러시는 차관급 회담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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