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꼬이는 한·중 관계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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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분노한 한국 한국에 실망한 중국 최후의 선택은?
1992년 공식 수교 이래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한·중 관계에 마침내 빨간불이 켜졌다. 좋기만 할 것 같던 한·중 관계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뜻밖에도 고구려사를 둘러싼 ‘역사 논쟁’이었다. 고구려사 서술에 대한 중국측의 일방적인 자국사 편입 작업, 이른바 ‘동북공정’이 야기한 불행한 사태다. 하지만 상황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한·중 두 나라간 우호 관계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지난 4월 총선이 끝난 직후, 국내 일부 언론이 국회의원 당선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설문에 응한 적지 않은 신참 국회의원들이 ‘앞으로 한국 외교에서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나라’로 ‘전통적인 동맹’ 미국 대신 ‘새로운 파트너’ 중국을 지목함으로써, 일각에서는 중국에 대한 우호 감정이 균형 감각을 잃고 지나치게 앞서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나올 정도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양국 관계는 지난해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무역국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는 듯했다. 때마침 2001년 이후 한·미 관계는 대북 해법과 한·미 동맹 재편 문제 등을 둘러싸고 최대 위기를 맞고 있던 터여서, 한국인에게 중국의 존재는 더욱 더 돋보이던 터였다.
물론 중국 또한 자국의 3대 무역국 중 하나인 한국을 중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외교 비중에 대한 중국 당국의 서열 구분법에 따르면, 21세기 들어서서 한국은 ‘우호적 협력 관계’에서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는 우호적 협력 관계와 달리 군사 분야의 교류·협력까지도 추진할 수 있는 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한국 외에 프랑스·파키스탄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 4월 이후 한·중 관계의 흐름은 ‘전면적 동반자 관계’라는 표현을 무색케 하는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고구려사를 자국 고대사의 한줄기로 편입하려는 중국측의 동북공정을 둘러싼 갈등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국은 타이완 총통 선거가 끝난 뒤 한국의 일부 국회의원들이 재선에 성공한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 참석하자, 이에 거칠게 항의하며 격한 감정을 드러낸 바 있다.

그 뒤에도 불미스런 사태는 꼬리를 물었다. 중국은 한·일간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동해’의 ‘일본해’ 표기에 대해, 일본 편을 드는 듯한 태도를 취해 한국인의 원성을 샀다. 게다가 지난 7월에는 국방연구원 등 한국 국가기관 10여 곳에 중국인 해커들이 침입한 사건이 터져, 한국 내에서 이 사건을 두고 ‘배후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있는 것 아니냐’ 하는 의혹까지 일기도 했다.

중국측은 나름으로 한국이 보여온 태도에 대해 실망감을 느껴왔다는 것이, 중국측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한 관계자의 전언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측은 특히 지난해 한국의 관계 당국이 대부분 중국인인 ‘외국인 노동자 불법 체류’ 문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앙금이 쌓였다. 한국의 관계 당국이 중국 처지에서는 같은 재외 국민인 ‘한족’과 ‘조선족’을 분리해 각각 다르게 처리한 데 대해 불만을 느꼈으나 양국 관계를 고려해 ‘유감 표시’를 자제하는 등 나름의 성의를 다했지만 내심 마땅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전언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또한 일부 한국 언론이 ‘부정확한 보도’ 또는 ‘과장 보도’로 한·중 관계를 더 꼬이게 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령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때 한국 국회의원 일부가 중국 현지 조사를 나가려다가 비자 발급이 늦어져 제때 출국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당시 일부 언론이 진상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중국 당국이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비자 발급을 ‘거부’한 것처럼 보도해 오해를 키웠다는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줄을 이으면서 국내에서는 이 사건들이 단순·우발성이 아니라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중국측의 모종의 원려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이라며, 지나친 확대 해석을 경고하는 전문가도 있다. 외교안보연구원 박두복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을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라며, 개별 사안에 대해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접근할 것을 주문했다. 예컨대 동북공정의 경우, 논쟁 과정에서 중국측 스스로가 외교 당국 공식 홈페이지에서 한국 근대사 이전 부분을 아예 삭제해버린 것은 스스로 분쟁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고 비판하면서도, 동북공정 그 자체를 반드시 한국사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 작업으로만 받아들여서도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중 간에 일고 있는 일련의 불미스런 사건이 깔끔하게 처리되지 못하고 자꾸만 꼬이는 이유를 최근 중국 내부의 복잡 미묘한 권력 구조와 사회 흐름의 변화에서 찾았다. 외교·국방·안보 문제에 관한 한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장쩌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2002년 11월 중국 공산당 제16차 당 대회를 통해 새롭게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등장한 후진타오 국가 주석간 입장 차가 조율되지 않아 중국 대외 정책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한·중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요인으로 박교수는 ‘중국 사회의 민족주의화’를 지적했다. 박교수는 ‘중국이 국력 상승기로 접어들면서 사회 분위기가 현저하게 민족주의로 흐르고 있다’면서, 바로 이같은 분위기가 사태를 냉정하고 원만하게 처리하는 데 필요한 합리적 사고를 방해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특히 그는 ‘한국의 20대와 중국의 20대는 판이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20대가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데 비해, 중국의 20대는 오히려 국가 또는 민족의 자부심에 기울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열린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중국 국가 대표팀이 일본에 패하자, 중국 젊은이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격한 반일 시위까지 벌인 것이 대표적이다.

고구려사 논쟁으로 야기된 한·중간 불협화음은 쉽사리 치유되기 어렵다. 한·일 간의 역사 논쟁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사 논쟁 또한 피차간 ‘민족 감정’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동북공정 문제가 제출된 이후 국내의 논의가 곧바로 ‘중국의 (역사) 패권주의 부활’에 대한 강한 의구심으로 급속히 옮아붙은 것이 이를 반증한다. 반면 중국측에서 볼 때 소수 민족 문제를 포함한 ‘주변 문제’는 ‘타이완 문제’와 더불어 양보할 수 없는 국가 안보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면 중국은 진정 지역 패권을 추구하는가. 적어도 중국 당국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이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선언 이래 중국 당국의 변함없는 대외 정책 원칙은 ‘화평공존(평화공존)’ ‘화평합작(평화협력)’ ‘화평발전(평화발전)’이었다. 고구려사 논쟁이 한창이던 지난 8월7일 중국의 주간 <랴오왕(瞭望)>은 협력을 재삼 강조하는 장문의 평문을 실었다. ‘동북아 국제 정치의 핵심은 협력이 되어야 한다’는 제하의 이 평문에서, 필자가 줄곧 강조한 것은 ‘협력을 통한 역내 안정’이었다.

하지만 이 평문의 필자가 ‘동북아 평화 발전의 최대 관건’으로 지목한 것은, 한·중 관계도 조·중 관계도 아닌, 다름 아닌 대미·대일 관계 등 ‘대국 관계’였다. 특히 이 평문은 일본에 대해 날카롭게 각을 세웠다. 일본 일각에서 자국 안보를 확보하는 방안으로 중·일 관계 개선 대신 미·일 동맹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데 대해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연목구어) 식이라며 강공을 퍼부었던 것이다.
동북아 관계에 대한 중국 당국의 사태 인식을 대변하는 이 평문은 한·중 관계에 대해 두 가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첫째, 중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는 대미·대일 관계, 즉 대국 관계에 대한 자체 상황 판단에 따라 유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처지에서, 중국이 자국 이해에 따라 한국을 이용할 수 있다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둘째, 최근 중국 당국은 타이완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긴장이 고조되면서 미·중 ‘신냉전’ 체제 형성 가능성까지를 내다보며, 주변 정세 변화에 바짝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을 <랴오왕>의 평문은 보여주고 있다. 이는 중국 처지에서 주변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움직임에도 상당히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그 대상에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미국과 오랜 동맹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를 의심하기 쉬운 상황에서 자칫 감정이 끼어들기 쉬운 역사 해석 작업을, 상대방의 성실성을 재는 주요 척도로 간주하는 것은 양국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냉전 시절의 오랜 공백 끝에 다시 관계를 맺은 지 어언 12년. 한번쯤 거래 장부를 꺼내들고 냉정하게 수지타산을 맞추어볼 시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상대방을 서로 ‘상종 못할 존재’로 규정해 마음을 닫아버리기에는 거래 기간도 짧았고, 시기도 적당치 않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양쪽이 흥분하면 수지 맞는 쪽은 따로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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