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의 펜, 언론 권력 깰까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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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동아> 치부 집중 폭로…
해당 신문, 전면전 피하며 "법적 대응"


사진설명 침묵의 카르텔 깼다 : <한겨레>는 3월6일부터 이른바 '메이저 신문'의 일그러진 모습을 1면에서 비판하고 나섰다.

<한겨레>가 동업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언론계 불문율을 깼다. 한겨레는 3월6일부터 '심층 해부-언론권력 시리즈'를 통해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조·중·동) 세 회사의 과거와 현재의 치부를 1면과 3면에 걸쳐 매일 쓰고 있다. 이 연재물은 '무한 권력의 횡포' '추악한 과거' '언론 개혁 해법' 등 3부로 이루어지며, 각각 7∼10회씩 실린다.

현재 연재 중인 1부는 조·중·동 사주 비리와 경영 비리를 폭로하고, 2부는 친일 행적과 독재 찬양으로 얼룩진 조·중·동의 과거사를 집중 분석한다. <한겨레>는 과거 4대 일간지의 하나였고 족벌 언론인 <한국일보>는 언론 권력이 아니라고 판단해 일단 사정권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한겨레>는 3월12일 현재까지 '동아마라톤재단 의혹 1,2' '도시계획 비웃는 언론 권력' '<조선일보>의 편법 상속' '<조선일보> 기자의 자성과 표적 보도 피해자의 울분' 등 다섯 편을 선보였다. 특히 시리즈 첫편으로 보도한 동아마라톤재단 비리 보도는 족벌 언론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보도에 따르면 <동아일보>는 국민 성금 40억원을 모금해 놓고 사업을 펼치지 않고, 마라톤 연습장을 눈썰매장으로 용도 변경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언론계에서 소문으로만 떠돌던 것을 <한겨레>가 확인한 후 기사화한 것이다. 이를 위해 민권사회1·2부·경제부·여론매체부 기자 10여 명을 추려 특별취재반을 꾸렸다. 특별취재반은 고광헌 사회부장과 김이택 법조팀장이 지휘하고 있다.


"족벌 언론 실상 처음 알렸다"


사진설명 폭로 : <한겨레>는 동아마라톤재단의 편법 상속 의혹을 제기했다. ⓒ<동아일보>

특별취재반원들은 관련 기사 취재를 위해 몇주째 기존 취재 라인에서 빠져 있다. 점심과 저녁도 먹지 못할 정도로 바쁜 특별취재반은 시리즈의 1부는 물론 2·3부 기사를 이미 출고해 놓고 국장단의 낙점을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 고영재 편집위원장은 "언론이란 권력을 비판하는 데 존재 의의가 있는데, 지금은 언론이 엄청난 권력이 되었다. <한겨레>는 정치권도 눈치를 보는 언론 권력을 해부해 독자에게 언론 개혁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김주언 사무총장은 "그동안 족벌 언론의 비리가 소문으로만 무성하게 제기되었다. <한겨레>는 이 비리들을 확인해 그 실상을 알리는 최초의 일간지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보도를 접한 독자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인터넷 한겨레의 토론방이나 <한겨레> 보도를 기사화하고 있는 <오마이뉴스> 게시판에는 이 보도에 대한 찬반 양론이 연일 뜨겁게 펼쳐지고 있다. <한겨레> 보도가 언론 개혁의 당위성을 일깨우는 좋은 기사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여당지답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기자들 처지도 이와 비슷하게 양분된다. '<한겨레>니까 할 수 있다'며 적극 지지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현상황에서 이런 기사를 1면과 3면을 털어 보도할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도 있다.

당사자인 조·중·동은 일단 <한겨레> 보도에 냉담하다. 이들은 기사로 맞대응하기보다는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조선일보>는 방일영 고문의 주식이 방상훈·방용훈 씨에게 편법으로 상속되었다는 보도가 나간 3월9일 저녁 <한겨레> 최학래 사장과 고영재 편집위원장 등 5명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또 <조선일보>는 다른 언론이 사실 관계가 정확하지 않은 <한겨레> 보도를 인용할 경우도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도 <한겨레> 시리즈가 끝나는 대로 사법 대응할 방침이다. <동아일보>는 지하철 1호선의 설계도를 구하는 등 반박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아직까지 별 매를 맞지 않은 <중앙일보>는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동아일보>의 한 관계자는 "신문이 특정 단체나 기업에 대응하는 데는 전면전과 국지전이 있다. 전면전은 계속해서 기사를 통해 상대방을 '조지는' 것이고, 국지전은 법적 대응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조·중·동은 광고주협회 수용자 조사 결과 구독률이 1.6%에 불과한 <한겨레> 보도에 일희일비하다가 여론의 관심을 끌게 된다면 별로 유리할 것이 없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행여 영향력과 공신력이 큰 방송이 관심을 갖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이미 지난해 12월 <한겨레21> 보도가 매체의 명예를 심하게 훼손했다며 고소한 바 있다.

이 보도가 나간 후 <한겨레> 내부는 사기가 충천해 있다. 이번 기회에 독자에게 언론 권력의 일그러진 면을 보여 주어 언론 개혁을 이루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독자 제보와 격려 전화, 메일이 답지하고 있어 사내 통신망에 이를 띄워놓고 돌려보고 있다. 또 출입처에서 조·중·동 기자를 만나면 껄끄럽지 않을까 걱정했던 <한겨레> 기자들은 조·중·동 기자들이 '다음엔 뭐냐' '살살 해라'는 식으로 말을 건네 생각보다 부담이 덜하다고 한다.

<한겨레> 기자들은 소송이 무서우면 이 기사를 쓸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조·중·동의 반발을 우려하고 있다. 일부 기자들은 1950년대에 만들려고 했다는 세종로공원이나 3천8백평짜리 사주의 집이 족벌 언론의 비리를 보여주는 적절한 소재인지 걱정하기도 했다. 또 3월6일 시작한 시리즈를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3월8일 하루 걸러 <한겨레> 지지자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의지는 좋지만 관련 취재가 완벽하지 않은 것 아닌지 걱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겨레> '실수'하면 언론 개혁 상처 입어


사진설명 폭로 : <한겨레>는 <조선일보> 방씨 일가의 편법 상속 의혹을 제기했다(위는 방일영 고문 저택). ⓒ<한겨레>

이 시리즈의 성패는 현재 연재되고 있는 1부에서 족벌 언론의 비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집어내느냐에 있는데, 취재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언론계에서는 <한겨레>가 만약 '아차'할 경우 <한겨레>의 공신력은 물론 언론 개혁의 정당성이 훼손될 위험도 있다고 본다. 또 일부 신문은 <한겨레>를 역공할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들이 주로 뒤지고 있는 것은 제지회사 리베이트·대기업 협찬 광고·임원의 부동산 보유 현황 등이라고 알려졌다.

이처럼 칼날 위를 걷고 있는 <한겨레> 구성원들이 가장 황당하게 느끼는 것이 '언론 개혁 주장=여당지'라는 편견이다. 일부 독자는 <한겨레>가 언론사 세무 조사를 하는 정부 편을 들어 보수 언론을 윽박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DJ 정권 출범 후 <한겨레>가 뛰어넘어야 할 높은 벽이 되어 버린 이런 편견을 이번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다시 확인한 셈이다. 정연주 논설주간은 3월4일자 <정연주 칼럼>에서 '개혁의 편이었던 <한겨레>가 DJ 정부에서 친여지로 분류되는 것은 깊이 반성할 일이다. 하지만 언론의 비판적 기능과 막무가내 색깔론 가운데 어느 것이 야성인지를 구분 못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한겨레> 구성원의 속을 태우는 것 가운데 또 하나는 현재 시민단체나 방송국이 <한겨레> 보도를 주시하고 있지만, 언론 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데 동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의 한 기자는 "시민단체나 다른 언론이 관계 사실을 논평하거나 중계하는 데도 이토록 신중한 것은 언론 권력이 얼마나 힘이 센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라고 지적했다.

KBS·MBC·SBS 등 방송 3사는 <한겨레> 보도를 지켜본 뒤 신중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일단 <한겨레>와 조·중·동의 싸움을 기사화할 방침이다. MBC는 지난 3월11일 관련 보도를 하려고 했으나 한 신문이 취재에 응하지 않아 12일에야 방영했다. 또 MBC와 KBS는 <한겨레> 보도와 상관없이 각각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한겨레>가 당긴 족벌 언론 비판의 불씨는 이제 방송으로 옮겨 붙을 태세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세무 조사 결과 발표에 순기능할 수도


언론계는 <한겨레>의 언론 개혁 시리즈가 끝나는 4월 말 방송이 신문을 비평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해 여론을 환기한다면 언론사 세무 조사 결과가 발표될 가능성도 크다고 본다. 즉 공익을 위해 공개하라는 여론에 떠밀려 정부가 세무 조사 결과를 전격 발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수 우익의 반발과 현정권의 일부 세력이 세무 조사 결과를 대선 정국에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시도를 봉쇄하고 언론 개혁에 사회의 역량을 집중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겨레>의 이번 시리즈는 단지 언론 개혁의 기폭제가 될 뿐 아니라 '보·혁 대결'의 전위를 담당하고 있다는 거창한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고영재 편집위원장은 "지난 2월 시작된 세무 조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독자의 혼란을 해소하려는 의도로 시리즈를 시작했을 뿐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족벌 언론이 얼마나 썩었는지 단순하게 봐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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