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유사, 한국군의 적?
  • 정희상 기자 (hschung@e-sisa.co.kr)
  • 승인 2001.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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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 더 받으려 군납유 입찰 거부 '안보 비상' 초래…
주한·주일 미군엔 싸게 공급


사진설명 이럴 수가…: 정유사들의 '가격 저항'으로 군납 유류 입찰이 네 차례나 무산되어 군용 유류 탱크가 바닥 날 지경이다.

군에 기름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국가 안보에 비상이 걸렸다. 국내 정유 5사가 올해도 국방부를 상대로 한 군납 유류 입찰 과정에서 '가격 저항'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 한 관계자는 앞으로 한 달 이내에 군납 유류 도입 낙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난해 도입해 둔 군용 유류가 바닥을 보이는 비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올해 군납 유류 입찰은 네 차례 있었는데, 3월12일에 있었던 마지막 입찰도 자동 유찰되었다.

올해 군납 기름 공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군 훈련 및 작전은 더욱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미 지난해 하반기 고유가를 이유로 국방부가 구매 물량을 축소했기 때문이다. 특히 육군은 그동안 고유가 시대에 대비해 시범 훈련을 최대한 억제하고, 유사시 전투 태세 준비도 통합 훈련으로 대체하는 등 다각적으로 유류 절약운동을 벌여왔다. 이런 긴축 안보 상황인데도 정유사들이 올해 또다시 가격 저항을 벌이자 다급해진 군은 일단 군용 기름을 외상 구매(사전 납품 후 협상 타결 때 정산)를 해서라도 비상 사태를 막겠다는 방침이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는 정유사들의 버티기가 심각하다고 보고 그동안 네 차례 입찰 과정에 집단 불참한 정유사들이 담합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군에 유류를 납품해 한 해 평균 3천억원 이상의 국민 세금을 가져가는 정유사들이 국방 안보를 볼모 삼아 벌이는 이같은 아찔한 곡예는 올해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에도 정유사들이 군납 유류 입찰 과정에서 담합해 무려 열세 차례나 유찰되었다. 5월 들어 전시 비축유마저 바닥 날 조짐을 보이자 다급해진 국방부 조달본부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요구 조건을 상당 부분 받아들여 1백50억원을 추가 부담해 바가지 구매라는 지적을 받았다.


바가지 계속 씌우기 속셈


사진설명 한국군은 봉인가 : 5대 정유사는 주한미군 공군보다 한국 공군(왼쪽)에 비싸게 항공유를 공급해 왔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는 별도 조사를 벌여 1998년부터 2000년 초반까지 군납 유류 입찰 과정에서 SK(주)·LG칼텍스정유·S-oil·현대정유·인천정유가 담합해 부당 이득을 취했다며 공정위 사상 최대인 과징금 1천9백1억원을 부과했다. 또 이들 5개 정유사를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지난 2월 초에 나온 검찰 수사 결과 5대 정유사는 지난 3년 동안 국방부 조달본부의 군납 유류 입찰 과정에서 8개 유종 별로 낙찰 예정 업체·들러리 업체·가격 등을 사전 합의해 응찰하는 방법으로 7천1백28억여원어치의 공급 계약을 따낸 점이 밝혀졌다. 검찰은 여기에 가담한 정유사 임직원들을 일괄 사법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특히 지난해 5대 정유사가 열세 차례나 입찰을 유찰시키는 바람에 국방부가 창군 이후 처음으로 전시 비축유를 20% 이상 사용한 사실을 공식 확인하기도 했다.

이처럼 된서리를 맞은 정유사들이 올해도 군납 유류 입찰 과정에서 가격 저항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국방부 조달본부가 낙찰 예정가로 제시한 유류 가격이 너무 낮다고 항변한다.

국방부가 예정가 기준을 싱가포르 현물 시장 가격인 국제 가격(MOPS 가격)으로 제시하자 정유사는 싱가포르에서 한국으로 수송하는 경비와 보험료까지 얹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정유사들이 군에 공급하는 유류는 한국에서 정제한 제품이어서 원유 도입 때 들어간 수송료와 보험료가 납품가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터무니없는 이중 부담을 요구하는 것이다.

국내 5대 정유사의 주장이 근거 없다는 점은 최근 새로운 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이들은 그동안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에 똑같은 군용 기름을 한국군보다 훨씬 싼값에 공급해 온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민주당 유삼남 의원이 최근 한국석유공사에서 군납 유류 가격 자료를 입수함으로써 드러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전투기에 사용하는 항공유의 경우 올해 국내 정유사들이 각 군에 납품한 ℓ당 공급 가격은 한국군이 3백14원, 주한미군이 2백53원, 주일미군은 2백52원이었다. 한국 공군에 ℓ당 무려 61원이나 바가지를 씌운 셈이다.

등유와 경유도 마찬가지다. 군납 등유는 한국군에 3백25원, 주한미군에는 2백87원에 납품했다. 국제 가격(2백45원)보다 높은 것은 물론 주한미군 공급가보다 ℓ당 38원 더 비싼 셈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정유사들은 주한·주일 미군에 공급하는 유류가 수출로 인정되기 때문에 원유 수입 관세 및 석유 수입 부과금이 환급되기 때문이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관세법 및 석유사업법에 따라 주한미군에 납품하는 유류에 대해 국내 정유사가 혜택을 보는 ℓ당 가격은 22.7원에 불과하다. 정유사는 원유 수입 관세 5%에 해당하는 9.7원과 석유 수입 부과금 13원(정액 부과금)을 환급받기 때문이다. 한국군에 납품하는 항공유에서 이 가격을 빼더라도 정유사는 국방부에 ℓ당 연평균 38.7원씩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체 항공유 납품 규모를 따지면 정유사는 국방부를 상대로 연간 1백54억원이나 폭리를 취하는 셈이다. 같은 방식으로 등유·휘발유·경유 등을 모두 합할 경우 정유사들이 국방부를 상대로 취한 폭리 규모는 3백35억3천여만원에 달한다.

과잉 생산된 물량이 있을 때만 수출해 왔다는 정유사의 주장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석유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국내 정유사들은 지금까지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주한·주일 미군에 유류를 공급해 왔다. 주한·주일 미군 납품 가격 정보를 입수한 유삼남 의원은 "주한·주일 미군보다 국군에 기름을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하는 국내 정유사들이 올해 집단으로 군납 유류 입찰 신청조차 하지 않은 것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이며 반국가적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제대로 대응 못한 조달본부 '한심'


더욱 심각한 문제는 유류를 해마다 비싸게 구매해 온 국방부 조달본부가 올해도 안보를 볼모로 한 정유사의 가격 저항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유사와 가격 협상을 벌여야 하는 조달본부는 당연히 모든 가격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국민 세금 낭비를 막는 협상 자료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조달본부는 그동안 국내 정유사들이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에 파는 똑같은 기름의 가격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는 극비 사항도 아니었다. 석유공사의 석유 정보처에 문의만 하면 알 수 있는데도 이를 소홀히 했다. 바로 이런 안일한 구매 관행 때문에 국방부 조달본부는 해마다 바가지를 써왔고, 일부 조달본부 관계자와 정유사 사이의 검은 거래 실태마저 드러났다.

현재 군납 유류 공급을 둘러싼 국방부와 정유사의 태도는 국민 세금을 둘러싼 힘겨루기 양상을 띠고 있다. 똑같은 제품을 주한·주일 미군에게 ℓ당 30∼40 원씩 싸게 팔아 온 정유사들이 수지 타산을 내세우며 집단으로 버티기에 나선 것은 안보를 볼모로 한 위험한 몽니로 비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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