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무색해진 '부시 본색'
  •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
  • 승인 2001.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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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미국 정상회의에서 강경책 고집…안보 전략 등 협상 겉돌아


유럽 언론은 지난주 내내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발걸음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6백50여명이나 되는 수행단을 이끌고 처음으로 유럽 순방길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의 순방 일정에서 특히 주목된 것은 6월14일 스웨덴의 항구 도시 괴테보르그에서 열린 '유럽연합(EU)-미국 정상회의'였다. 10년 전부터 매년 두 차례 열리는 정기 모임이 특별히 관심을 모으게 된 배경으로는 먼저 최근의 정세 변화를 들 수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의 관계는 부시 정부 출범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까지 악화하고 있다. 지난 3월 말, 부시는 '교토 기후협약 의정서'를 비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10년을 넘기는 협상 끝에 이루어진 국제적인 합의를, 그것도 슈뢰더 독일 총리와의 회담을 몇 시간 앞두고 거부한 미국의 행태에 유럽연합은 경악했다.


부시는 미국이 소련과 30년 가까이 유지해온 ABM(탄도탄 요격 미사일) 제한 협정도 폐기 처분하겠다고 밝혀 유럽연합을 또다시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유럽산 철강에 올 가을부터 수입 관세를 부과한다는 미국 정부 방침도 유럽연합을 바짝 긴장시켰다.


유럽연합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기회로 미국과의 협상에 주목했지만 그 결과는 기대 밖이었다. 정상회담의 성과를 묻는 질문에 스웨덴 총리는 "우리가 합의한 것이라고는 어느 하나 합의를 볼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라고 답했다.


부시는 유럽과의 협상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고 유럽 언론은 전한다. 안보 전략을 둘러싼 협상은 미국이 강경책을 고집한 대표적인 사례인데, 부시의 유럽 순방 일정에서부터 그 치밀한 계산이 드러난다. 그는 스웨덴 회의에 앞서 스페인과 벨기에를 찾았다. 스페인 정부는 서유럽에서는 처음으로 미사일 방어(MD) 구상을 지지했다. 스페인의 지지를 확인한 부시는 벨기에 나토회의에서 체코·헝가리·폴란드·터키 정부도 미사일 방어 구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부시는 이른바 '불량 국가'들의 미사일이라는 냉전 이후의 위협에 대비하려면 '냉전 시대의 전략'(ABM 제한협정)부터 버려야 하며, 유럽연합도 미국의 전략에 '새로운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로버트슨 나토 총장은 나토 안에서 합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는데, 결국 미국의 구상을 유럽연합도 지지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반면 프랑스는 ABM제한협정이 이룩한 '전략적 안정'은 건드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독일은 미국과 전략 구상을 검토하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미사일 방어 구상에는 '해명할 문제'가 남아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나토 총재의 해석은 아직 추측일 뿐이다.


EU, 미국의 나토 확대 구상에 반대


부시는 스웨덴 회의 이후 폴란드를 거쳐, 차기 나토 가입국으로 유망한 슬로베니아에서 푸틴과 만났다. 미사일 방어 구상은 물론 나토를 동유럽으로 확대한다는 구상이 확고하다는 뜻을 간접으로 전한 것이다.


반면 유럽연합은 옛 소련 지역으로는 나토를 확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유럽연합이 미국의 안보 전략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겉으로는 러시아나 중국을 의식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려는 유럽연합의 독자적인 안보 구상이 있기 때문이다. 옛 소련 지역의 상당 지역은 이미 나토가 아닌 유럽연합의 안보 기구에 편입되어 있다. 유럽연합의 안보 구상이 나토를 보완할 수 있으나 대체할 수는 없다고 미국이 누차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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