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순에게 공들였는데…"
  • 남문희 기자 (bulgot@e-sisa.co.kr)
  • 승인 2001.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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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첫 외무 회담 '불발'…
북한, 허 종 대사 파견해 대화 여지 남겨


지난 주말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는 긴박하게 돌아 갔다. 평양 본부로부터 7월25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제8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 회의에 백남순 외무상이 참석하지 않는다는 결정에 뒤이어, 주말에는 외교부 허 종 순회대사가 대신 참석한다는 급전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뉴욕대표부에서 공사와 차석 대사를 지낸 허 종 순회대사는 북한 외교가에서 손꼽히는 미국통이라고 할 수 있다. 백외무상이 불참해 북한 대표단의 격이 낮아질 것이라며 낙담하던 한·미외무 당국자들에게 그의 갑작스런 출현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한·미 외교 당국은 이번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 커다란 기대를 가져 왔다. 특히 미국측은 지난 7월 중순까지도 파월 국무장관을 중심으로 백남순 외무상의 참석을 유도하기 위해 북한측을 설득해 왔다. 파월 국무장관은 지난 7월 초 미국 의원들과의 비공개 간담회 때 이번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열릴 북·미 외무장관 회담에 크게 기대를 걸고 있으며, 백남순 외무상이 이 자리에 참석하도록 북측을 설득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지난 7월10일 미국 국무부 고위 당국자가 출입 기자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백남순 외무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그가 오리라고는 추측하지만 더 지켜 봐야 한다"라고 밝힌 것만 보아도 북측의 태도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를 창구로 한 협상 과정에서 미국 국무부는 지난 6월7일 부시 대통령이 대북 협상의 3대 의제로 핵·미사일·재래식 병력 문제를 거론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전제 조건을 내걸고 있는 것은 아니며, 협상 의제를 조정하기 위해서도 만나서 얘기하자며 북측을 설득했다.


특히 미국측은 북한이 우려하는 재래식 병력 감축 문제와 관련해 북한에 일방적 감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도 주한미군 지상군 감축 등의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발표된 주한미군 기지 반환 문제 역시 북측에 보내는 메시지의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북측이 미국의 의도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지상군을 감축하는 대신 한국을 미군의 첨단 방어망 체계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는 점이나 일본의 군사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움직임 등을 볼 때 결과적으로는 군비 강화로 귀결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북한측은 미국 의회의 일부 의원들이 최근 황장엽씨를 초청하려 한 의도에 대해서도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황씨의 입을 빌려 북한 재래식 병력의 위험성을 널리 선전해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것이다.


'한·미 일정에 안 끌려간다' 천명


물밑 협상 과정에서 북측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같은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미국측의 선행 조처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지난 7월17일자 미국의 〈비즈니스 위크〉는 최근의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북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없다는 것을 선언하라고 북한이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미국측이 자신들의 요구 사항에는 명확히 답하지 않은 채 한국 정부와 더불어 백외무상의 참석을 국제적으로 기정 사실화하면서 일종의 외교적 압박을 가하려 한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결국 북한은 백외무상 전격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한국과 미국이 설정한 일정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한 셈이다.


동시에 허 종 대사를 대리 출석 시켜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허대사가 차기 유엔대사로 유력하다는 점 역시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현재 유엔대표부 주변에는 `'북·미 관계의 본격적인 돌파구는 허 종 시대에 열리게 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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