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가 '정보' 제공했다?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1.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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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원 8명의 '언론 사태 우려 서한' 전달 전모


지난 7월16일 미국 하원 의원인 다나 로라배커 의원을 비롯한 공화당 의원 7명과 마이클 카푸아노 민주당 의원 등 8명이 한국 언론 사태와 관련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공개 서한을 보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언론 전쟁'에 왜 끼어들었을까




선봉에 서서 : 공개 서한(맨 왼쪽) 전달을 주도한 로라배커 의원(왼쪽)에게 누군가가 자세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주목할 사실은, 이들이 서한에서 의례적인 우려 표시 차원을 넘어 국세청의 구체적인 조사 내역은 물론 특정 정치인의 발언까지 거론하며 문제점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지적한 내용을 보면 미국 의원들이 평소 이 정도로 한국 문제에 소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깜짝 놀랄 정도다. 누군가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 이 문제는 한국의 언론 사태에 대한 미국 의원들의 '우려' 표시와는 별도로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인 것 같다.


미국의 경우 상·하원을 막론하고 각 의원들에게는 평균 3∼4개씩 상임위원회가 중복 배당된다. 그런 만큼 의원들은 지역구 민원을 챙기랴 상임위원회에 출석하랴 연중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평소 시시콜콜히 외국 상황을 파악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이번 서명운동의 중심 인물인 로라배커 의원의 예를 보자. 7선인 그의 현 직책은 하원 과학위원회 우주항공소위원회 위원장이다. 그는 또 에너지소위원회, 국제관계위원회 동아태소위원회와 중동및남아시아소위원회 등 소위원회 세 군데에서 활동하고 있다. 역시 서명 의원인 공화당 로스코 발레트 의원은 에너지소위원회 위원장이자 우주항공소위원회, 군사위원회 소속 연구개발소위원회, 작전태세소위원회, 중소기업위원회 소속 규제개혁및감독소위원회, 농촌사업·농업·기술소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서명에 가담한 8명 가운데 로라배커 의원을 포함해 벤저민 길먼·크리스 스미스·애덤 푸트남 의원 등 5명이 국제관계위원회 소속이다. 언론인 출신인 로라배커 의원은 과거 중국의 최혜국대우 지위 부여 반대운동을 벌인 보수파다. 길먼 의원은 1995년부터 올해 초까지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며 북한 제재 결의안을 주도한 인물이다. 스미스 의원은 국제관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지난 3월 로라배커·퍼트 웰든 의원과 함께 김대통령에게 언론 자유를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


그밖에 5선인 잭 킹스턴 의원은 세입위원회를 포함해 농업소위원회·내무소위원회·국제활동소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고, 민주당 소속인 마이클 카푸아노 의원은 재정위원회와 예산위원회 소속이다. 이들을 규합해 서명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로라배커 의원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설령 특정국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상임위원회 소속이라도 일반적으로 해당국 내정을 손금 보듯 훤히 파악하는 미국 의원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이번 서한에 서명한 의원들이 주목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로라배커 의원 등 8명은 이 서한에서 한나라당의 대정부 경고 성명, 언론과 '한판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노무현 전 해양수산부장관의 발언, 국세청 요원 4백명 중 상당수가 이른바 '빅3' 신문사 조사에 투입되었다는 점, 1백50개 이상의 신문지국에 대한 지방 세무당국의 급습, 나아가 신문 고시를 부활하기로 한 공정거래위원회를 한국신문협회가 비난한 사실, 독립 언론사를 겨냥한 정부 소유 매체의 공세설 등등을 세세히 나열했다. 이들이 평소에 이런 정보를 챙겼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자는 지난 7월20일 오후 이번 서명운동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로라배커 의원의 언론담당 비서인 리카르도 버날 씨와 전화 통화를 했다. 버날 씨는 로라배커 의원이 서한의 구체적인 내용을 직접 파악했는지 여부에 대해 "그 점에 대해선 밝히지 않겠다(We're not going to reveal that)"라고 말했다. 기자가 "누군가 외부에서 정보를 제공했는가?"라고 거듭 묻자, 그는 직답을 피한 채 "그런 사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We learned about it, yes)"라고 말해 그러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기자가 로라배커 의원의 지역구가 한인이 많이 사는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임을 상기시킨 뒤, 혹시 한인 교포가 정보를 제공했느냐고 묻자 그는 "밝히지 않겠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그 정도만 얘기하겠다(That's all I am going to say about that)"라고 대답했다. 이와 관련해 주미 한국대사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기자에게 "로라배커 의원의 지역구가 오렌지 카운티인 점을 감안할 때 재미 동포가 관련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만 확증은 없다"라고 밝혔다.


당시 전화 통화에서 버날 씨는 이번 공개 서한과 관련해 비교적 소상히 털어놓았다. 우선 그는 로라배커 의원이 지난 3월에도 한국의 언론 자유와 관련해 공개 서한을 김대통령에게 보냈으나 직접 답변은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다 지난 7월14일 〈동아일보〉 김병관 명예회장 부인이 투신 자살한 소식을 듣고 두 번째 서한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언론에 대한 한국 정부의 압력이 증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로라배커 의원이 충격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시정하지 않으면 또 행동할 것"


그는 "이번에 8명만 서명한 서한을 보낸 것은 다른 의원들이 우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서둘러 서한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의 언론 사태를 우려하는 의원이 "최소 20명에서 30명은 된다. 서명 의원들은 한국의 상황을 주시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번 서한과 관련해 양성철 주미 한국대사는 지난 7월16일에 길먼 의원을 직접 만난 데 이어 18일에는 해당 의원들에게 서한을 보내 적극 해명에 나섰다. 그러나 양대사의 서한에 대해 버날 씨는 "로라배커 의원은 이를 한국 정부가 언론을 압박하기 위한 또 다른 구실이라고 간주한다"라고 밝혔다. 버날 씨는 만약 한국 정부가 언론 사태와 관련해 '즉각적으로(immediately)' 시정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다른 행동 방안(other avenues of action)'이 있다면서, 의회 차원의 결의안을 한 예로 들었다. 그는 서명 의원들이 현재 공청회는 필요없다고 생각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그것도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의원들의 공개 서한과 관련해 지한파인 조지타운 대학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박사는 "일정 부분 정당하게 우려를 표시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동기는 없어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서한이 이미 국내적으로 압력에 직면한 김대중 정부에 또 다른 압력이 되고 있다. 이런 압력이 야당에 의해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라고 경고했다. 그는 "주한미군을 두고 있고, 또 한국과 방위 동맹을 맺은 상황에서 미국이 어느 정도 한국 문제에 관심을 표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미국 의원들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김대중 정부가 아무리 선의의 목적을 가지고 언론사 세무 조사를 한다 해도 외부 세계에 언론 탄압이라는 인상을 줄 소지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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