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나는 대화 무드에 임동원 해임 '찬물'
  • 남문희 기자 (bulgot@e-sisa.co.kr)
  • 승인 2001.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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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관계·주변국 외교에 큰 파장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중도 하차는 하반기 남북 관계나 한반도 주변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나라당이나 일부 언론은, 임장관 한 사람이 물러났다고 해서 대북 포용정책이 차질을 빚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에 대해 '남북 관계의 복잡 미묘한 측면을 간과한 피상적인 생각'이라고 말한다.




과거 서독의 동독 정책은 동독에만 국한한 것이 아닌, 유럽 전체와의 관계를 치밀하게 고려해서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대북 포용정책의 중심에 서 있던 임장관의 거취는 남북 관계뿐 아니라 주변국 외교에까지 커다란 파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고위 당국자는 "임장관은 북한 문제뿐 아니라 주변국 관계의 세세한 부분까지 꿰뚫고 있는 현정부내 최고 전문가이다. 이런 전문가가 정책 일선에서 물러나면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듯이 임장관이 청와대 특보 형태로 재기용된다면 모를까, 적어도 현시점에는 그를 대체할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남북 관계에서 임장관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역할을 이해하려면 멀게는 1990년대 초 기본합의서 체결 과정에까지 거슬러가야 한다. 당시 고위급 회담 대표였던 임장관은 바로 이 기본합의서의 산파역을 담당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기본합의서가 6공화국뿐 아니라 현정부 대북 정책의 기본 설계도라는 점이다.


지난해 6·15 남북 정상회담이나 그 이후 정부가 북측에 제의해 놓은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경의선 복원,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문제 등은 이 기본합의서에 바탕을 둔 것이다. 기본합의서가 남북 관계의 미래 방향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총설계사인 임장관의 중도 퇴장은 남북 모두에 악재가 될 수밖에 없다.


정책 총설계사 퇴장, 남북에 '악재'


지난 3월 한·미 정상회담 이후 북·미 대화와 남북 대화가 중단되면서 한반도 시계는 멈춘 듯했다. 그러나 남북한과 미국은 급반전을 기대하며 조용히 숨 고르기를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대전환의 문턱에서 당사국인 한국 정부의 중추 인물이 현장에서 물러나게 되어 북한은 물론 주변국들 역시 황당할 것이다.


우선 미국과의 관계. 클린턴 행정부 때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었던 임동원씨는 윌리엄 페리 한반도 조정관의 한국측 파트너였다. 당시 페리 조정관은 약 1년을 작업한 끝에 클린턴 행정부의 북한 정책을 집대성한 페리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사실상 이 보고서의 내용을 채워넣은 것은 임동원 외교안보수석팀이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정부 당국자들은 페리 보고서를 '임동원판 페리 보고서'라고 부르기도 했다.


임장관은 이처럼 미국이 한반도 정책을 세울 때 우리 정부의 포용정책을 대변한 중심 인물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부시 행정부 집권 초기에 미국 보수파가 임장관을 매우 못마땅해 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는 부시 행정부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새로운 동북아 전략 틀을 짜기 전에 남북한이 앞서 나가는 것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올해 3월 한·미 정상회담 이후 부시 행정부는 남북 대화를 중단시켰다는 내외의 거센 비판에 직면해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 새로운 동북아 전략의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하면서 지난 6월 북한에 대화를 제의한 이후 적극적으로 북한과의 채널을 열려는 모습을 보여 왔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북·미 간에 진행될 하반기 대화의 최대 이슈가 바로 군축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부시 정부의 외교 안보팀 일각에서는 이미 주한미군 지상군 일부 철수와 북한군의 후방 배치를 맞교환하는 방식을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국방정책 대전환과도 깊이 맞물려 있는 현안 중의 현안이다. 따라서 미국은 군축 협상의 또 다른 당사국인 한국측에 이 문제에 정통한 협상 채널이 있기를 바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군 경력의 대부분을 군비 통제 분야에서 쌓은 임장관이 없음을 아쉬워할 수밖에 없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이 바로 페리 조정관이 재등장할 가능성이다. 부시 행정부 일각에서는 페리 조정관을 하반기 대북 협상의 구원 투수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페리가 재등장한다면 클린턴 행정부 때부터 그와 호흡을 맞추어 온 임장관의 빈 자리가 더욱 커보일 것이다.


"한국 정치인들, 민족 대업 관심 없다"




최근 서울 주재 중국 특파원이 임장관 해임과 관련한 '한국적 정치 상황'에 대해 발언한 내용을 보면, 중국측이 과연 이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기자와 통화한 이 특파원은 "중국은 그동안 임장관이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온 점을 높이 평가해 왔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민족적 대업'은 안중에도 없이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다른 특파원들 사이에서도 임장관 문제가 화제가 되었다고 밝힌 그는 "중국이 사회주의 초급 단계라면 한국은 민주주의 초급 단계인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부 인사가 돌출 행동을 했다고 해서 국가 대사를 맡고 있는 장관을 갈아치우는 모습이 보기 딱하다는 지적이다.


9월3일부터 5일까지 장쩌민 중국 주석은 역사적인 북한 방문 길에 올랐다. 당·정·군의 고위급 인사 100여명을 대동한 그는 중국식 어법이긴 하지만, 남북 대화를 재개하라고 김위원장을 설득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현재 한반도 주변 4강 중 남북 긴장 완화를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국가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은 중국 주변에 타이완과 한반도라는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해 왔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등장한 뒤로는 이런 입장이 더욱 강화되었다.


현재 부시 행정부는 △미사일방어(MD) 강행 △미·러 관계 복원 △인도·파키스탄 등 서남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강화를 추진하면서 3면에서 중국을 압박 포위하고 있는데, 한반도에서마저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중국은 사면초가 상황에 몰린다. 따라서 중국의 하반기 한반도 정책 역시 김위원장의 남한 방문을 측면 지원해 남북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한국적 정치 상황'에서 비롯한 임동원 파문에 대해 중국이 황당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북 대화가 진전하기를 바라기는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러시아는 지난번 푸틴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정상회담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를 상호 연결하는 문제에 합의하고 꿈에 부풀어 있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의 성사를 좌우할 남북 관계가 불투명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주변 국가 중 예외를 든다면 아마 일본 정도일 것이다. 고이즈미 내각 등장 이후 일본은 우경화 논리로 내부를 결집하고, 경제난 극복을 위한 구조 개혁에 전념해야 할 처지다. 따라서 한반도 정세 진전에 대응할 여력이 없어 당분간 현상태로 고착되기를 희망한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번 사태로 인해 교과서 문제나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일 공세가 약해지는 부수입도 챙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입장. 남북 대화를 주도해온 임장관의 사퇴가 북한 내 대남 협상파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킬 것이 뻔하다. 북측 대화 창구인 조평통이 임장관 해임안 표결 하루 전인 지난 9월2일 전격적으로 당국간 대화를 제의해온 것도 바로 이런 위기 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야당은 '임동원 구출 작전'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이는 시기만 다소 앞당긴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즉 그동안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이 장쩌민 주석 방북을 계기로 대미 관계와 대남 관계를 진척시킬 대화 제의를 해올 것이라고 예견해 왔다.
북한 대화파에게도 날벼락


올해 3월 한·미 정상회담 이후 김용순을 중심으로 한 북한내 대화파의 입지는 북·미 대화 중단과 남북 경협 축소 등을 이유로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일부에서는 8·15 축전 때 북측이 남측 방북단의 3대헌장탑 참관을 강행한 것도 내부의 강경파를 달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장주석 방북과 10월의 부시 대통령 방한을 남북 대화를 재개할 기점으로 판단해 왔을 북한내 대화파의 관점에서 그 협상 파트너인 임장관의 돌연한 사퇴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 아닐 수 없다.


임장관 해임 과정을 지켜본 한 '왕보수' 중진 정치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9월과 10월 이후 남북 관계나 주변 정세에서 일어날 변화를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임장관은 절대 해임되어서는 안될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에서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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