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투기는 ‘비리의 날개’로 나는가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2.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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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X사업, ‘제2의 율곡 사건’으로 번질 가능성
최규선 게이트의 불똥이 차기 전투기(FX) 사업에까지 튀었다. 미국 하원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스티븐 솔라즈 전 의원은 최근 “최규선씨로부터 한국 정부가 보잉의 F15 전투기를 확신하고 구입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일이 있다”라고 시인했다. 그는 최씨와 직접 만난 자리에서는 물론 e메일로도 이같은 제안을 자주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씨가 역할과 대가 등을 명확히 알려주지 않아 자기가 로비 작업에 나서지는 않았다고 한 발짝 물러섰다.




솔라즈 전 의원의 발언으로 최규선씨가 보잉 사를 위한 로비 활동을 상당히 활발하게 벌인 사실은 확인된 셈이다. 물론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보잉측은 최규선씨를 F15 로비스트로 고용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최씨가 보잉과 아무런 관계나 연락도 없이 로비 활동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
“최씨 사무실 운영비 GE가 지원”


최규선씨가 각종 무기 도입 사업에 개입했다는 의혹은 이미 여러 갈래에서 감지되었다.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되어 수감된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은 지난 4월23일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최규선씨가 지난해 무기 구입 사업에까지 간여해 내가 견제했더니, 홍걸씨와 함께 청와대와 검찰을 시켜 나를 뒷조사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근 FX사업 기종 결정을 미국 보잉 사의 F15로 확정한 김동신 국방부장관 역시 지난해 4월 최규선씨와 장관 공관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져 의혹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김장관은 최규선씨와 서너 차례 만났다는 점은 시인하면서도 무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최씨와 김장관이 만난 직후 최씨로부터 이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은 한 인사는 최근 기자에게 “그 날 국방부장관 공관에 찾아간 최규선씨가 오전 2시까지 머무르다 나와서 `‘김동신 장관과 마주 앉아 발렌타인 30년산을 다 비우고 왔다’고 자랑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규선씨가 유아이홀딩 컴퍼니라는 무기 중개 회사를 차린 뒤 조태환씨를 회장으로 앉히고 무기 도입 사업을 벌이다가 사업이 잘될 조짐을 보이자 조씨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대표이사가 되었다고 전했다. 최씨는 이 무렵 책상에 항공 관련 잡지를 쌓아 놓고 DHL 편으로 미국 각지에 국내 정보를 내보냈다고 한다.


이같은 최규선씨의 행적은 국정원에도 포착되어 결국 이를 제지하려는 김은성씨와 최규선씨 사이에 심각한 알력이 빚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최씨 회사에 근무했던 한 직원은 이렇게 전했다. “지난해 4월께 김은성 2차장을 만나고 온 최규선씨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국정원이 무기 도입 사업에 뛰어든 최씨에게 얼마나 심하게 엄포를 놓았는지 겁에 질려 한동안 압구정동 집에도 못 들어갔다. 그 무렵 최씨는 술만 마시면 김은성 2차장을 거론하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보겠다고 험악한 말을 늘어놓았다.” 결국 이같은 증언은, 김은성씨가 ‘국정원이 무기 도입을 제지했다는 이유로 최규선씨가 홍걸씨와 공모해 청와대와 검찰을 동원해 나를 뒷조사했다’고 폭로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최규선씨의 무기 도입 개입 의혹과 관련해 또 다른 최씨의 측근은 회사 내에서 한때 최규선씨가 미국 군수업체인 GE 사와도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국내 민항기와 군용기 엔진 제작사인 GE 사는 최근 국방부가 차기 전투기로 결정한 F15에 장착될 엔진 제작사로 선정되어 2억3천5백만 달러어치 엔진을 수주하기로 되어 있다. 최규선씨와 GE 사의 관계가 의혹의 도마에 오른 것은 최씨 스스로가 현정권 실세로 통하는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아들 정민씨를 미국 GE 사에 취업시켰다고 자랑하고 다니면서부터였다. 1999년부터 권노갑씨의 비서로 들어간 최씨는 권정민씨를 취업시키기 위해 자기가 젝 웰치 회장까지 만나고 다녔다고 주변에 자랑한 적이 있다. 물론 권씨측에서는 최씨가 정민씨의 GE 취업 과정에서 길 안내만 했다고 해명했다.


최규선씨가 운영하던 미래도시환경의 또 다른 전 직원은 2000년 초 한때 사무실 운영비가 GE에서 나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때 직원이 5명이었는데 강남 테헤란로 선일빌딩 12층의 100평 사무실과 직원 월급, 운영비가 한 달에 수천만원씩 들어갈 때였다. 운영자금에 대해서 물어보니 경리 직원이 `‘GE에서 1억원이 들어왔다’고 말해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최씨 측근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GE 한국지사 책임자는 “최규선씨는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고, 그의 이름도 이번에 신문을 보고 알았다”라고 주장했다. 미국 GE 본사와의 직접 거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마침 국방부와 협상차 방한한 토머스 이글 GE 아시아 군용엔진담당 책임자를 만났다. 그는 최규선씨와 GE 간에 불거지는 의혹을 부인했지만, 권노갑씨의 아들 정민씨가 GE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공식 확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GE로서는 권정민씨가 석사 출신 우수한 엔지니어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말이 없다. 전세계 34만명의 직원 중 정치인 아들도 끼어 있는데 권씨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최씨, 보잉과 비밀 에이전트 계약”


그러나 이같은 당사자들의 해명은 최규선 게이트의 불똥을 차단하기 위해 나온 말일 수도 있다. 여전히 최씨의 무기 도입 로비를 둘러싼 ‘신뢰할 만한 의혹’은 도처에서 제기되고 있다. 국내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최규선씨가 미국 보잉 사의 로비스트로 1천2백만 달러에 달하는 비밀 에이전트 계약을 체결했다는 징후는 오래 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아울러 이 과정에는 최씨 외에도 권정민씨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으며, 이들은 단순히 F15만이 아니라 보잉 사가 한국을 상대로 팔고자 하는 다른 무기 매매 로비에 나섰다고 말했다. 특히 2000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군사 보안을 담당하는 정부기관이 보잉 사의 아파치 헬기 도입 사업과 관련해 각종 의혹이 제기되면서 집중 감시에 들어갔는데, 일부 여야 국방위원과 이들 두 사람의 동태도 중점 감시 대상이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실장은 “최규선 게이트가 터지면서 불행하게도 FX사업은 제2의 율곡 비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아들을 포함해 정권 핵심에 대한 F15 로비 의혹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그 진상이 규명되기 전까지 김대중 대통령이 재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시민단체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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