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출 작전인가, 몰살 작전인가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dwj@sisapress.com)
  • 승인 2002.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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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신경 가스 살포해 인질범·인질 ‘살해’…체첸 반군, 테러 계속할 수도



타협이냐, 무력 진압이냐? 지난 10월23일부터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뮤지컬 극장을 무대로 벌어진 체첸 반군의 인질극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강수를 선택했다.


결과는 참혹하다. 사건 발생 나흘째인 지난 10월26일, 러시아 특전사는 기습 작전으로 러시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질극을 끝장냈다. 이 과정에서 체첸 반군 50여 명이 죽었고, 반군에게 잡혀 있던 인질 7백여 명 가운데 1백17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현지 시각으로 10월27일 현재). 정체 불명의 신경 가스를 동원한 진압 방법은 잔혹성·도덕성 시비말고도, 국제법 위반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등 러시아 당국에 적지 않은 후유증을 던지고 있다.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인질극은 10월23일 저녁 9시께 복면을 한 체첸 반군 50명 가량이 총을 난사하며 모스크바 뮤지컬 극장에 침입해, 관객과 극장 관계자들 7백여 명을 인질로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인질 석방 조건으로 체첸 전쟁 즉각 중단과 러시아 연방군 철수를 요구했다.


사면초가 체첸 반군, 벼랑끝 테러 감행


사태가 발생한 즉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고, 연방안전국은 곧 경찰 병력과 ‘알파’ ‘오멘’ 등 특수부대 병력을 극장 주변에 배치했다. 이른바 ‘천둥’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같은 시각 유리 루쉬코프 모스크바 시장·블라지미르 우스티노프 검찰총장, 그리고 체첸 출신 두마(하원) 의원들은 반군과 협상을 시도했다. 이들은 반군의 국제 통화 내용을 도청하며 협상의 실마리를 잡으려 했고, 아울러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동향도 파악하려 했다.


체첸 문제는 10년을 넘긴 해묵은 과제이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한 직후 체첸 공화국은 독립을 요구했으나 묵살되었다. 이후 독립을 쟁취하려는 체첸과 이를 연방 정부에 묶어두려는 러시아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1994년 1차 체첸 전쟁으로 번졌다(1996년 종료). 그러나 갈등과 긴장의 불씨는 계속 남아 있었고, 1999년 9월 모스크바 아파트 폭파 테러 사건으로 2차 체첸 전쟁이 터졌다.


전쟁 개시 이후, 러시아는 체첸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인권 침해를 비난하는 서방의 압력과 체첸 반군들의 결사 항전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와중에 9·11 테러가 터졌다. 9·11 사태는 푸틴 대통령에게는 체첸 문제를 덮을 절호의 기회였다. 러시아는 9·11 사건을 통해 체첸 반군과 알 카에다와의 연관성을 부각하고, 그들을 테러 집단으로 몰아치며 정치·군사·외교 측면에서 강하게 압박하는 계기를 얻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모스크바 인질극 사태를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처한 체첸 반군들이 상황 반전을 위해 취한 ‘벼랑끝 전술’이라고 판단한다. 즉 힘의 열세·외교적 고립·자금난·이슬람 세계에 대한 편견과 압박 등 각종 요인이 얽혀 체첸 반군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암묵적으로 체첸을 비호해왔던 그루지야까지 최근 러시아의 거센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굴복하는 상황에 이르자, 체첸 반군들은 생존의 마지막 거점까지 상실할 수도 있는 위기에 내몰렸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인질극이 세계적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한다. 최근 인도네시아 발리와 필리핀의 몇몇 도시에서 발생한 테러가 체첸 반군을 자극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체첸 반군이 국제 테러 조직과 연계해 인질극을 계획했을 수도 있다.


알 카에다 대원 “체첸 독립 전쟁에 참전 원했다”


특히 알 카에다와의 관련성이 집중 제기되고 있다. 사실 체첸 반군과 알 카에다는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다. 양측은 종교·이데올로기 면에서 동병상련 처지이며, 군사·재정·마약 사업 면에서는 끈끈한 동반자이다.


공교롭게도 사건 발생 직전 인질극과 알 카에다의 긴밀한 관계를 암시하는 사건도 잇달아 발생했다. 인질극 발생 하루 전인 10월22일에는 그루지야 정부가 체첸 반군의 게릴라 거점인 ‘판키시 계곡’에서 체포한 아랍계 알 카에다 조직원 15명을 미국측에 넘겨준 사건이 있었다. 그 중에는 알 카에다 군사위원회 소속인 사이프 알 이슬람 엘 마스리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관측도 있다. 같은 날 독일 함부르크에서는 9·11 테러 혐의로 기소되었던 무니르 모타사데크에 대한 재판이 열렸는데, 그는 재판정에서 “나는 체첸 독립을 위해 투쟁하길 원했다”라고 밝혔다.


요컨대 이번 인질극 사태는 체첸 분리주의에 대한 러시아 연방 정부의 가혹한 정책을 공격 목표로 한 ‘반(反)러시아 투쟁’과, 반테러 국제 공조를 차단하려는 이슬람권 테러 조직의 ‘지하드(聖戰)’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다.


모스크바 당국은 이같은 체첸 반군의 저항에 일단 철퇴를 내리치는 강공책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신경 가스를 동원한 이번 진압 결과는 모스크바 당국에 추가 부담을 안기고 있다. 벌써부터 국제법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진압 작전 때 정체 불명의 신경 가스를 사용한 사실을 들어, 화학 무기 금지에 대한 국제 규약을 어겼다며 러시아를 공격하고 있다.

또한 전문가들은 ‘분리주의에 대한 정부의 가혹한 정책과 세계의 무관심이 더 큰 폭력으로 발전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바로 이같은 상황을 예언한 것일까. 체첸 출신 알 카에다 조직원 무니르 모타사데크는 지난 재판 때 러시아를 겨냥해 “강압과 폭력으로 문제가 해결된 적이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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