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이익치, 공포탄 ‘탕탕’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2.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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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관련 폭로 내용 설득력 부족…“후일 위해 한나라당에 보험 든 것” 해석도
'돌아온 장고’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막판 대선 가도에 해일을 일으키고 있다. 이씨는 10월27일에 도쿄에서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실을 들어 폭로하더니 11월16일에는 아예 서울로 돌아와 추가 폭로에 나섰다. 현대중공업이 1988년 이후 네 번의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인건비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정몽준 후보를 지원해 왔다는 것이다.




현대중공업 현금 흐름에 이상 징후 없어


‘정몽준 저격수’로 나선 이씨가 폭로한 지원설은 과연 사실일까. 이씨는 정후보가 총선 때마다 현대중공업의 결산보고서를 변칙 처리하는 방식으로 매번 수백억원을 끌어다 썼다며, 지원 금액이 얼마인지는 선거 이전과 이후 연도의 결산보고서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99∼2001년의 현대중공업 결산보고서를 보면, ‘현금 흐름의 특별한 이상 징후’는 발견되지 않는다. 급여 항목의 경우 1999년 1천4백24억원, 2000년 1천4백33억원, 2001년 1천6백15억원으로 나타나 있다. 16대 총선이 치러진 2000년의 급여 내용이 1999년과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복리후생비(각각 3백31억원, 3백58억원) 항목도 비슷했다.


다만 선거 다음해에는 선거가 있었던 해에 비해 변동 폭이 다소 컸다. 2001년의 경우 두 항목이 2000년보다 각각 1백82억원, 98억원 늘어난 것이다. 특히 급여 등이 포함되어 있는 2001년 판매비와 관리비(6천8백13억원)는 2000년보다 1천4백59억원이나 증가했다. 하지만 지난해 매출액이 7조4천억원인 회사에서 판매비와 관리비가 1천5백억원 가량 늘어난 것을 꼭 선거자금으로 징발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 재계 자금 담당자들의 견해다.


이씨가 1차 폭로한 주가 조작 건은 총선지원설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금융감독원 조사2국장으로서 조사를 지휘했던 박태희 현 금감위 조사기획과장은 “조사 당시 정후보가 관련되었다는 정황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검찰 조사에서 더 분명해지지 않았나. 관련설에 휘말린 오너도 정후보가 아니라 정몽헌 회장이었다”라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당시 주임 검사였던 한견표 동부지청 부부장 검사도 “이씨의 정후보 연루 주장은 일고할 가치도 없다”라고 반박했다.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도 11월15일자 〈중앙일보〉에서 ‘이익치도 사람이냐’는 말로 그를 깎아내렸다. 그의 말은 이랬다. “나도 주가 조작 사건과 관련해 검찰 조사까지 받아 내막을 잘 안다. 정후보가 개입했더라면 (이씨는) 아마 검찰 조사 때 먼저 불었을 인간이다. 당시 정후보는 현대중공업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김씨의 말은 정후보가 당시 현대중공업 고문으로 있었지만, 계열 분리 전인 현대중공업의 경영을 사실상 좌지우지한 것은 그룹 종합기획실이었다는 현대 관계자들의 주장과 맞아떨어진다.





재계 관계자들은 이씨의 폭로가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심지어 현대 관계자들은 이씨를 ‘희대의 사기꾼’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재계에서 무게를 두는 것은 그가 왜 정후보 흠집 내기에 나섰느냐는 정치적 배경이다. 이와 관련해 정후보측은 한나라당 사주설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지난 10월 이후 이씨의 행보에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씨가 2년 가량의 침묵을 깨고 뭔가 말하기 시작한 것은 〈중앙일보〉를 통해서였다.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특파되었던 이 신문 김시래 기자는 한 치과 병원에서 이씨를 10월12일(현지 시간) ‘우연히’ 만났다(보도는 14일자). 김기자에 따르면, 이 첫 인터뷰 동안 이씨는 “정몽헌 회장이 무엇이 섭섭한지 2년 동안 연락조차 없었다”라고 말했을 뿐 정후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김기자는 11월8일 두 번째 인터뷰를 했고, 이는 엿새 뒤인 14일자에 실렸다).


그러던 중 미국 휴스턴에 머무르던 이씨가 김기자에게 다시 연락해 온 것은 10월21일(현지 시각). 정후보에 대해 말할 것이 있다는 얘기였는데, 두 사람은 2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날 이씨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김기자는 26일 귀국했다. 다음날 이씨의 도쿄 폭로를 듣게 된 김기자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고, 이씨에게 왜 배반했느냐고 따졌다. 10월10일 이후 27일까지 이씨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일련의 흐름이 있었던 것 같다는 것이 김기자의 추론이다.


한나라당 개입한 확증은 없어


정후보 진영은 한나라당이 이씨의 심경을 바꾸지 않았는지 의심하고 있다. 그 정황으로 우선 10월10일 이후 한나라당 박재욱 의원과 이한구 의원이 금감원과 검찰에서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 관련 자료를 받아갔다는 사실을 든다. 또 이씨가 도쿄 폭로 전 이회창 후보의 동생인 이회성씨와 만났다는 ‘회동설’을 제기하고 있다. 김충식 전 사장이 인터뷰에서 “이익치가 정후보를 저토록 인신 공격하는 것은 개인 감정 이상의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것도 정가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국민통합21은 이 ‘뭔가’를 한나라당과 이씨의 유착으로 보고 있다. 아직 이씨의 행보에 한나라당이 개입했다는 확증은 없는 상태다.


이씨는 왜 정후보를 물귀신처럼 끌어들이고 있을까. 재계 관계자들은 정치적 배경은 베일에 싸여 있지만 경제적 동기만은 분명하다고 본다. 바로 현대중공업이 2000년 제기한 소송 건으로 이씨는 전재산을 날릴 처지에 놓여 있다. 올해 1월 현대중공업은 서울지법으로부터 2천4백억원 가운데 70%에 해당하는 1천7백18억원을 하이닉스와 현대증권, 이씨가 배상하라는 승소 판결을 얻어냈다(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이씨가 한나라당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후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씨는 이회성씨에게 10억원, 한나라당 후원회에 20억원을 주었다는 것을 세풍 사건 때 폭로한 바 있었다. 한나라당에 미운 털이 박혀 있었던 이씨로서는 보험을 들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요즘 증권가에서는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의장과 관련 회사들이 어려움에 빠지리라는 관측도 나온다. 심지어 정의장이 이씨를 앞세워 한나라당에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는 풍설마저 떠돈다. 정의장 관련 회사들은 현재 유동 자금을 4조5천억원이나 쌓아두고 있는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와 달리 대부분 경영 사정이 좋지 않다.


이에 대해 재계의 한 관계자는 “한나라당에서는 현대건설과 현대상선 등이 이미 채권단의 영향 아래 놓여 있어 대선 이후 자연스럽게 전문 경영인 체제로 개편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라며, 그 과정에서 대주주인 정의장의 책임을 물을 터여서 그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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