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여 한판 붙자” 청년 우파 ‘커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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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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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보수’ 표방한 젊은 모임 속속 등장
박혜윤씨(연세대 정외과 3년)가 ‘커밍아웃’을 결심한 것은 지난 4월이었다. 그녀가 동성애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간 갈등해 온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녀는 일종의 커밍아웃을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박씨는 한때 학생 운동권에 몸 담았던 좌파 대학생으로 주변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번 기회에 스스로 밝힌 자신의 정체성은 이른바 꼴통 수구도, 얼치기 진보도 아닌 ‘건전한 보수’였다.

박씨처럼 정치적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대선을 전후해 등장한 새로운 현상이다. 최근 인터넷에는 ‘청년 우파 연대’‘보수주의 학생연대’‘자유를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미래 한국 연구회’ 같은 보수주의 성향의 모임이 속속 생겨나 세를 불리고 있다. 인터넷 카페 형식으로 개설된 이들 모임의 회원 수는 보통 천 명에 육박한다. 물론 이전에도 보수를 표방한 젊은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햇볕정책이나 언론사 세무 사찰에 반대해 ‘안티 DJ’를 부르짖고 나선 온라인·오프라인 단체가 여럿 있었다. 특정 종교 단체를 구심점 삼아 북한 민주화운동이나 탈북자 인권운동에 매진하는 단체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등장한 ‘젊은 보수’나 ‘청년 우파’ 모임은 과거와 일정하게 구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치·종교 단체와 무관하게 자생적으로 출발한 조직이 많다는 점, 온라인을 주된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 진보·좌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수 야당으로 대표되는 기존 보수 엘리트 집단에 대해서도 뿌리 깊은 불신과 반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 이들의 공통된 특성이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이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행동 지향형·토론 지향형·대안 모색형이 그것이다. 우선 행동 지향형. 민족 자주 노선을 표방한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기 상황이 도래했다고 믿는 이들은 ‘청년이 서야 나라가 산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온라인·오프라인을 두루 넘나들며 ‘좌파와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의 자세는 자못 전투적이다. 자신들을 ‘꼴보수’라 몰아붙여도 기죽지 않는다. 오히려 ‘꼴진보’라 응수하며 공격 수위를 더 높여간다. 사이트에 가입할 때 ‘김정일 싫죠? 예, 아니오로 답해 주세요’처럼 화끈한 사상 증명을 요구하는 것도 이들의 특성이다. 장외 집회에도 적극 참여한다. 삼일절과 4·19를 기념해 서울시청 앞에서 잇달아 열린 보수·우익계 집회에서는 20∼30대 참가자가 전에 없이 늘어난 것이 눈에 띄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지난 한두 달 사이 벌어진 MBC 규탄 시위, <조선일보> 옹호 시위, 서승목 교장 추모 시위 또한 이들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과거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서의 보수·우파와 자신들을 동일시하지는 말아 달라고 청년우파연대 최용호 대표(36)는 강조했다. “박정희 유신 정권이나 5공 정권을 그리워하는 세력과 우리는 다르다”라며 이른바 조갑제(<월간 조선> 편집장) 추종자로 대표되는 전통적 우파 세력과 선을 긋는 그는, 미국 비판에는 열을 올리면서 북한 핵 문제나 북한 내 인권 문제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좌파에 대항하기 위해 ‘개혁적 우파’의 연대체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젊은 보수’의 두 번째 유형은 토론 지향형이다. 보수주의학생연대(보학연)를 필두로 한 이 집단은 대학가 및 온라인 커뮤니티 전반에 만연해 있는 ‘진보 일방주의’에 반기를 들되, 그간 단절되어 있던 보수-진보 세력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적극 모색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이 때문에 이들은 색깔이 불분명하다고 다른 우파 단체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한다).

보학연 대표인 박세완씨(고려대 법학과 4년)에 따르면, 보수 성향을 지닌 대학생들은 이제껏 일방적인 진보 문화로부터 ‘핍박’을 받아 왔다. <조선일보>를 읽는다고 말했다가는 학교에서 ‘또라이’ 내지는 속물 취급을 받는 것이 단적인 예. 박씨는 텔레비전 토론에 나가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 방송이 나간 직후 박씨의 선배 하나가 박씨를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술집에서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학 사회에서 보수적인 목소리는 반드시 필요하며,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고 박씨는 주장한다. 이제 기성 정치의 울타리 안에서도 진보 정치를 기대할 수 있게 된 만큼 보수 정치권을 지망하는 학생이나 보수적인 사회 참여 욕구를 지닌 학생도 캠퍼스 내에서 자신들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 연세대·이화여대를 중심으로 세를 확대하고 있는 미래한국연구회나 한국대학생경제학회는 자유민주주주의·시장 경제 옹호 및 헌정 질서 수호를 제1의 가치로 내걸고 있다. 대안 모색형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은 좌파 세력과 당장 소모적인 대립각을 세우느니 온라인·오프라인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주력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좌파 세력이 정권을 잡기 위해 10년 이상을 연구한 것으로 안다. 우리도 10년 앞을 내다보며 준비하겠다”라는 것이 미래한국연구회 운영자 김성욱씨의 말이다. 이를테면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한 신자유주의 엘리트를 양성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인 셈이다. 이를 위해 이 단체는 지난 4월 말 회원 1백40여 명을 무료로 초청해 경기도 양평의 한 콘도에서 1박2일간 포럼을 열기도 했다. 이 행사는 재계 이익을 주로 대변해 온 자유기업원이 후원했다.

이 날 행사에 강사로 참여했던 이춘근 이화여대 겸임교수(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는, 획일적인 대학가 풍토에서 이런 모임이 느는 것 자체가 매우 고무적 현상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같은 움직임이 ‘합리적이냐, 아니냐’라는 잣대를 유념하지 않는다면 치기 어린 반발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 정준영 교수(동덕여대·사회학)의 지적이다. ‘똑같은 것은 무조건 악(惡)이다’라는 식으로, 정당한 시대적 개혁 과제에 대해서까지 딴죽을 거는 태도는 올바르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청년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지난 대선이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정부가 집권에 성공하면서 ‘보수=주류 세력’이라는 전통적인 등식에도 균열이 생겼다. 정준영 교수는 개혁 세력이 제도권에 속속 편입되면서 ‘진보의 순수성’에 대한 환상이 깨져 나가고, 대학 사회의 계층 분화가 심해져 ‘부자 신입생’이 늘어남에 따라 이들이 좀더 떳떳하게 자신을 내세우는 커밍아웃 바람이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나 자민련이 무작정 좋아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 대선 직후 충격에 휩싸였던 청년 보수주의자들은 ‘개혁하는 보수’ 쪽으로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재정립했다. 일부 우파는 ‘한나라당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며 사이버 정당을 건설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파 네티즌 ‘5대 유형’
청년 우파라고 무조건 한묶음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미래한국연구회 사이트에 올라 있는 ‘노대통령 당선 이후 우파 네티즌들의 유형별 분석’(ID:훼드라)이라는 글을 발췌해 소개한다.

아빠 무서워, 살려줘형
주로 전통적인 보수 단체나 사이트에서 아저씨, 할아버지들 하고 논다. 조갑제 편집장이나 지만원 박사의 명문이라도 하나 올라오면 천하의 진리라도 캐낸 듯이 여기저기 퍼나른다.

한나라당 만만세형
제2 노사모 같은 한나라당 지지 혹은 팬클럽을 만들거나 활동한다. 한나라당이 다음에 집권하지 못하면 나라가 진짜 망할 것 같아 전전긍긍한다. 요즘 대표 경선이 얼마 남지 않아 쓸데없이(?) 바쁘다.

우리도 뭉치자형
대선 이후 많이 볼 수 있는 유형으로, 단시일 내 많은 회원을 확보한 점이 눈에 띈다 오프라인 집회나 모임을 가지는 곳이 많다

나홀로 투쟁형
<한겨레>건, 진보누리건, 안티조선이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용감무쌍하게 싸운다 비추천이 100건을 넘어가도 눈썹 한번 까딱 안한다. 쭦 Only 북한 인권형 북한 인권만 거론하면 만사 오케이인 줄 알고 그 일에만 몰두한다. 그 외 웬만한 일에는 거의 신경 안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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