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광순··이강진의 좌충우돌 정치 입문기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3.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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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개혁신당 준비위 고은광순·이강진의 좌충우돌 정치 입문기
이름하여 백이숙제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더러운 정치판을 피해 고고하게 살다 가겠다는 이 병증은, 사회 지도층은 물론 평범한 소시민 사이에도 그간 꽤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것이 깨진 것은 극히 최근이다. 지난 대선을 계기로 ‘정치적 대오각성’을 했다는 이들이 급기야 정치판에 본격적으로 몸을 던지고 있다.

지난 6월19일 범개혁신당 추진운동본부 준비위원회가 발표한 내년 총선 출마 예정자 1백20인 명단에는, 과거 같으면 정치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을 듯한 보통 사람들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이 날 출마 의사를 밝힌 고은광순씨(48)와 이강진씨(41)를 통해 이들 개미군단의 정치 입문기를 좇아 보았다.


보통의 한의사라면 국회에서 선전 전단을 뿌리다 쫓겨나거나, 인터넷에서 거친 육두문자를 주고받으며 논전을 벌이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은광순씨(‘호주제 철폐를 위한 시민의 모임’ 대표)는 유신 정권과 맞서 싸우느라 두 번 제적당한 대학 시절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으면 품위고 기득권이고 주저없이 버려온 사람이다. 부모 성(姓) 함께 쓰기, 호주제 폐지 등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를 들썩거리게 만든 여성운동의 맨 앞줄에 그녀가 있다.

이강진씨(극단 예인 대표)는 연극에 미쳐 다니던 은행을 세 번이나 그만둔 배우 겸 연출가이다. 1980년대 후반 산울림소극장 무대에 선 것을 마지막으로 귀향(경기도 수원)한 그는 그 뒤 지방의 척박한 문화 토양을 살찌우겠다며 수원 시내에서 벽촌소극장을 운영해 왔다(불행히도 이 소극장은 극심한 운영난에 시달리다 지난해 9월 결국 문을 닫았다).

둘 다 ‘엉겁결에’ 출마를 결심했다. 지난해 여름, 노무현 후보가 낙마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그를 지켜낼 새 정당(개혁국민정당) 결성에 분연히 앞장선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일단 정당을 만들려면 지구당이 25개 이상 필요하다는 현행 법 조항 때문에 지구당 창당을 자원했고, 그 바람에 지구당위원장까지 맡게 되었지만 대선이 끝나면 모든 것이 정리될 줄 알았다.

그러나 고은광순씨는 지난해 말 ‘고은사람들’(cafe.daum.net/koeunsaram)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자신의 정계 진출을 전방위로 후원하고 나선 여성들에게 등을 떠밀려, 이강진씨는 개혁당 내에서도 ‘전국 최고의 즐당(즐거운 지구당)’으로 꼽힐 만큼 돈독한 유대를 자랑하는 당원들의 암묵적인 강요에 등 떠밀려 각각 출마를 결심하게 되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일단 출마를 결심하고 나면 가장 큰 문제가 돈과 조직이다. 매달 만원씩 당비를 내는 진성 당원이라고 해야 100명 남짓한 두 사람 모두 돈 나올 구석은 별로 없다. 그래도 아직까지 개인 호주머니가 축 날 일은 별로 없었다. ‘만원당’이라는 개혁당 별칭에 걸맞게 지구당 모임이나 회식 때마다 1인당 만원씩 갹출해 경비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사이버 정당 체제로 운영해온 만큼 지구당 사무실도 필요없었다.

그렇지만 총선 출마를 본격 선언한 이제부터는 상황이 다르다. 당장 사무실을 얻고 상근 인력도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강진씨는 일단 지구당 당원들에게 지난 대선 때 쓰고 남은 ‘희망돼지’를 1인당 5마리씩 분양했다. 내년 총선 때까지 사료(성금)를 잘 먹여 이들 돼지를 살찌우는 것이 당원들에게 주어진 1차 임무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사람 모두 지구당위원장이라는 사실이다. 지구당위원장은 지구당 이름으로 후원회나 각종 행사를 열 수 있다(지구당도 없는 사람은 출판기념회 등 온갖 편법을 동원해 정치 자금을 모아야 한다. 이 때문에 1백20인의 출마 예정자는 ‘정치 신인의 활동을 가로막는 현 선거법은 인권 침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고은광순씨는 지난 6월27일 첫 지구당 후원회를 열어 총 4천1백47만원을 거두어들였다. 기성 정치인들로서는 ‘하품 날’ 액수지만, 이를 알뜰하게 쪼개 내년 총선까지 치러보겠다고 야무지게 다짐한 그녀는 이번 후원회 모금액뿐 아니라 앞으로의 수입·지출 내역까지도 지구당 홈페이지에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선거를 앞두고 지구당 조직을 어떻게 운용할지는 둘 다 미지수. ‘당원 3백명이 조직이냐’고 비웃을 사람도 있겠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당원 한 사람이 100명 역할을 해내는 ‘일당백 효과’를 몸소 겪은 이들은 수적 열세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아가 이들은 유시민 의원이 선거 과정에 도입해 효과를 보았던 ‘연고자 찾기 네트워크’(전국에 산재한 지지자들이 해당 지역구에 사는 연고자를 추천해 선거운동을 벌이는 방식)를 적극 활용할 생각이다.

두 사람 모두 한나라당의 아성으로 손꼽혀 온 지역에 도전한다. 고은광순씨는 서울 양재동(서초 을)에서 한의원을 10년째 운영하는 만큼 이 지역에서 출마하는 편이 그나마 유리할 듯한데도 ‘환자가 표로 보이는 것은 싫다’며 거주지인 서초 갑을 고집하고 있다.

이강진씨는 이른바 수고(수원고) 출신이 아니면 공천받기도 어렵다고 할 정도로 배타적 정서가 강한 수원 장안구에서 출마한다(이씨는 삼일상고 출신이다). 단 개혁신당을 성공시키면 수원 정서도 단번에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이씨는 오는 7월12일 수원 지역 정치개혁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데 온 힘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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