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돼지 멱 따는 소리 말라”
  • 부산·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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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장사 출신 ‘국민의 힘’ 정치개혁위원장 이상호씨의 항변
“제가 일어나서 나가 버립니다.” 지난 7월6일 ‘국회의원 바로알기 운동,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를 주제로 벌어진 <100인 토론>(KBS2 TV)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판단이 0.1초쯤 정지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생방송 토론 도중 경상도 사투리를 억세게 쓰던 패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색이 된 사회자는 “나가시면 안됩니다. 나가시진 않겠죠?”라고 다급하게 만류했다.

이 희대의 촌극을 벌인 이가 바로 ‘국민의 힘’ 정치개혁위원장 이상호씨(39)이다. 본명보다 ‘미키 루크’라는 아이디로 더 유명한 이씨는, 자기가 스튜디오를 나가 버리면 방송의 룰을 어기는 것이듯 국회의원이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면 그 또한 룰을 어기는 행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같은 돌출 행동을 벌였다고 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 날 토론은 극심한 찬반 양론을 낳았다. 그는 ‘토론자로서 자질 부족’ ‘단순 무식함의 극치’라는 비판과 ‘서민다운 화법’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인과 비교되는 진정성의 승리’라는 옹호를 동시에 받았다.
알고 보면 이씨는 진작부터 호오가 엇갈려 온 인물이다. ‘노사모’ 부산지역 대표 일꾼이자 대선특위 상임위원장으로 전국을 누비며 지난 한 해 선거법 위반 17건이라는 ‘기록’을 세운 그에게는 늘 ‘또라이’ ‘미친 루크’라는 험담과 ‘열정의 대명사’라는 찬사가 동시에 따라 다녔다.

사실 이씨가 살아온 행적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고졸 학력에 현재 직업 양말 장사. 느끼한 아이디가 말해 주듯 여자 꼬시기와 돈 벌기가 인생의 최대 목표였다는 이 남자가 난데없이 정치 개혁을 부르짖는 투사로 변신하게 된 과정은 그 자체가 난해한 수수께끼나 다름없다.

어쩌면 비밀을 풀 열쇠는 격정적인 그의 기질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스스로의 좌우명을 이렇게 표현한다. “옳다고 생각하면 (그 길에) 대가리 박아!” 단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그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돈 많이 벌어 두 아들에게 풍족함을 물려주는 삶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노찾사’ 노래 가사를 찾아 인터넷을 헤매고 다니다가 노사모에 잘못 접속한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노사모의 모든 것에 공감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돈 좀 벌어봐야겠다 했지예. 이 정도 회원 수면, 잘만 이용하믄 백 억은 거뜬히 벌겠다 싶었지예.”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버렸노라고 고백한다. 그를 감염시킨 병원체는 노무현. “광주에서 콩이면 부산에서도 콩, 대구에서도 콩인 세상. 원칙과 상식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어 보자”라는 호소는 급기야 불혹을 앞둔 한 사내의 인생 전반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로부터 지난 2년여 세월을 그는 ‘바람이 나도 단단히 났다’고 요약한다. 그의 무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획력과 추진력. 모두가 ‘될까?’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때 그는 ‘된다!’고 외치며 뛰어들었다. 무모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민 경선 제도를 처음 접했을 때 그는 ‘이건 남는 장사’라는 확신이 들었단다. 제도는 선진적으로 갖추어졌는데 국민 의식은 아직 이를 따르지 못한다? 이 간극에 놓여 있는 틈새 시장을 뚫으면 ‘대박’이 터진다는 것이 장사꾼인 그의 감이었고, 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그는 부하 직원 23명 전원을 비롯해 5백명이 넘는 지인을 국민 경선 인단에 끌어들이는 괴력을 발휘했다.

지난해 여름, 노무현 후보 지지도가 바닥을 치고 있을 때 ‘희망돼지 분양 전국 투어’ 아이디어를 낸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누구나 양말은 신는다. 그렇지만 양말을 사기 위해 백화점을 찾지는 않는다’는 상식을 역으로 이용해, 눈에 쉽게 띄는 곳에 판매대를 배치함으로써 그간의 판매 기록을 모조리 갱신했던 이씨는 이 전략을 희망돼지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누구나 돈 안드는 정치를 바란다. 그렇지만 이를 위해 직접 나서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유권자에게 다가가자.’

그로부터 두 달 남짓. 이삿짐 차를 개조한 트럭에 희망돼지 100만 마리를 싣고 그는 전국을 돌았다(이삿짐센터 이름이 공교롭게도 ‘그날이 오면’이었다). 노사모를 빼고는 모두가 회의적이었지만 그는 결국 희망돼지 60만 마리를 분양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의 기억을 지금도 생생하게 가슴에 품고 있기에 그는 최근의 사태를 더더욱 용납할 수가 없다.

이른바 굿모닝시티 사태가 터지고 며칠간 한숨도 못잤다는 그는 ‘희망돼지 목에 칼을 꽂은’ 정치인들의 행위에 격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반 국민들이 애기 저금통까지 깨어서 후원하며 ‘깨끗한 정치’를 열망하는 동안 등 뒤로 검은돈을 받아 챙긴 정치인은, 여권 대표건 누구건 즉각 구속해 죄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아가 한나라당이 응하지 않으면 대통령부터라도 대선 자금을 ‘홀딱 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같이 까자는 게 어딨십니꺼. 노무현 스타일로 밀고 나가이소. 그 다음은 국민들에게 맡기이소. 혼자만 벗고 있으면 챙피하다고예? 걱정 마이소. 국민들이 절대로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거라예.”

격정에 찬 어투로 호소하던 그는 희망돼지를 ‘국민 기만극’이라고 매도하는 일부 세력에 대해서는, 오히려 냉정한 거리를 잃지 않았다. 이들을 접하다 보면 오래 전 서울을 방문했던 북측 대표가 생각난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 보여주려고 자동차 옮겨놓고 건물 짓느라 고생 많았겠시오”라고 진심으로 말하던 북측 대표처럼,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사람들이 있는 한 자신들은 ‘이기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확언한다.

최근 논란을 일으킨 국회의원 바로 알기 운동(일명 ‘금배지, 그들이 알고 싶다’ 운동)에 대한 그의 ‘터무니없는’ 자신감도 여기에 기인한다. 국민의힘이 ‘노사모 2중대’ ‘노무현 친위조직’이라고 공격당해도 그는 눈 한번 꿈쩍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죽었다 깨나도 모를 끼라예. 자발성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라고 말하는 그는 ‘참여’에 이미 맛을 들인 개미들이 내년 총선에서도 ‘사고’를 치고야 말 것이라고 자신했다.

단 “제도 정치권에서 걱정하는 것처럼 2000년 식의 낙선 운동은 벌이지 않겠다”라고 그는 말했다. 낙선자 명단을 따로 만들어 발표하는 것은 유권자를 무시한 엘리트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대신 그는 국회의원 2백72명 전원에게 질의서를 보낸 다음 답변이 오면 온 대로, 오지 않으면 오지 않은 대로 관련 내용을 인터넷에 공시함으로써 유권자가 판단할 1차 자료로 삼게 할 작정이다. 쓸 만한 정치 신인은 팍팍 밀어주되, 악질적인 구태 정치인은 ‘미친 루크’ 콘셉트로 기발하게 괴롭히겠다는 것 또한 그의 중·장기 구상이다.

그는 올해도 양말 장사를 공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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