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저격수 3인, 오발탄만 쏘았네
  • 김은남 (ken@sisapress.com)
  • 승인 200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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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김경재·유종필·노관규, 열린우리당 맹폭…호남 민심 이반해 재·보선 참패
‘과녁이 빗나갔다.’ 10·30 재·보선 결과 텃밭인 호남에서 완패한 뒤 민주당 내부에서 오간 푸념이다.

애초의 과녁은 물론 열린우리당이었다. 오랜 기간 지지고 볶아온 한나라당 대신 새로운 적과 대면한 민주당은 전투에 앞서 전열을 가다듬고, 신흥 저격수를 충원했다. 김경재 의원·유종필 공동대변인·노관규 예결특위 위원장. 이 세 사람은 민주당·열린우리당 간에 벌어진 대선자금 공방 와중에 폭로 국면을 주도하며 신예 병기로서의 가능성을 유감 없이 과시했다.

일단 김경재 의원은 한때 ‘적진’에 몸 담았던 이점을 활용해 상대 진영을 교란했다. 지난 10월27일 민주당 기자실은 불난 호떡집처럼 부산했다. 김의원이 이 날 “(대선 당시) 이상수 의원이 ‘5대 그룹이 맞추기나 한 듯 똑같은 액수를 가져왔다’고 했다”라며 열린우리당의 대선자금 축소 신고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김의원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측이 ‘이중 장부’를 운용했을 가능성을 추가로 제기하기도 했다. 그의 발언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난 대선 때 민주당 선대위 홍보본부위원장을 지낸 대표적 친노(親盧) 인사였다. 당시 그가 이상수 의원과 함께 돈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뛰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안다. 따라서 그의 발언에는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 하면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언론 특보 출신인 유종필 대변인은 능수능란한 수사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가 민주당 대변인으로 취임한 것은 9월 말. 그러나 불과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는 거의 매일 기삿거리를 생산하며 정가 최고의 뉴스메이커로 떠올랐다. 그가 주목되는 이유는, 김경재 의원과 마찬가지로 친노 진영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탁월한 입심을 아울러 갖추었다는 상품 가치 때문이다.
민주당 국민경선 시절 이인제 후보가 ‘음모론’을 제기하자 “음모론의 관점에서는 해가 뜨는 것도 음모이고 해가 지는 것도 음모다”라고 맞받아쳐 유명해진 그는, 민주당 대변인으로 취임한 뒤에도 연일 ‘히트작’을 양산했다. 대선 직후 노대통령 참모들이 돈벼락을 맞았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도 그는 “파도가 몰아치면 입을 다물어도 짠물이 들어오게 마련인데 모두가 정신없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라고 기발한 비유를 동원해, 각종 언론 매체의 ‘말·말·말’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세 번째 저격수로 떠오른 노관규 위원장의 무기는 전문성. 세무 공무원 출신으로서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 시절부터 이미 ‘자금 수사통’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이번에 민주당 선대위 회계 처리에 문제가 있다는 의혹을 주도적으로 제기하면서 일약 전국적 인물로 떠올랐다(그는 현재 서울 강동 갑 지구당위원장을 맡고 있다). 분당 직후 그가 예결특위 위원장을 맡아 회계 감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당 안팎에서는 ‘조만간 노작두(노위원장의 별명)가 일을 낼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이들 세 저격수는 일단 민주당을 화제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당 내에서 상찬을 받았다. 미움받는 것보다 서러운 것이 잊히는 것이라고, SK 비자금 사건 이후 민주당 내부에서는 소외감이 대단했다. 정국이 한나라당 대 열린우리당 양자 대결 구도로 짜이면서 ‘민주당이 자민련처럼 들러리나 서게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그러던 중 이들 세 사람의 활약으로 언론이 연일 자기네를 조명하니 민주당으로서는 살 판이 났다. 덕분에 한나라당도 어부지리를 얻었다.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을 공격하면서 여론의 초점에서 비켜난 한나라당은 민주당 등뒤에 숨어 잠시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의기양양한 것도 잠시, 민주당은 갑자기 싸늘하게 식어 버린 민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10·30 재·보선이 있던 당일 오전. 의원총회에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성토의 목소리를 높이는 의원들을 지켜보던 한 당직자는 “우리가 지금 미친 짓을 하고 있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재·보선을 앞두고 광주 민심을 탐방하고 돌아왔다는 이 당직자는 ‘민주당이 왜 한나라당 좋아할 짓을 하고 있느냐. 우리가 한나라당 2중대냐’고 항의하는 지역민 때문에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세 저격수도 당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이들이 주장한 내용의 사실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김경재 의원의 홈페이지에는 ‘이혼하고 전처 욕하면 결국 자기 얼굴에 누워서 침 뱉기 하는 거다’(ID:순천에서) ‘그래도 한때 정권 재창출을 위해 함께 노력했던 사람들로서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것 아니냐’(ID:전라도행인) 같은 비난 여론이 쇄도했다. 어렵게 살아온 이력이 비슷해 노대통령과 자주 비견되던 노관규 위원장 또한 ‘강동의 노무현이 강동의 정형근으로 거듭났다’는 비아냥에 시달렸다.

이쯤 되자 세 사람은 얼른 꼬리를 내렸다. “나를 저격수라 부르지 말고 ‘민주당 지킴이’라 불러 달라”고 일단 진화에 나선 김경재 의원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 같은 데도 출연을 피하는 등 몸을 사리고 있다. 김의원은 또 검찰이 수사 의지를 밝힌 이중장부 건에 대해서도 자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나섰다. 이 바람에 곤란해진 사람은 유종필 대변인이다. 의원들은 단순히 장부에 문제가 있다는 요지로 얘기했는데 여기에 유대변인이 이중장부라는 자극적 카피를 갖다붙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공개 회의에서 이중장부라는 발언이 분명히 나왔다. 단 누가 그 발언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폭로전의 역풍을 맞아 이렇듯 서로가 책임을 전가하는 동안 일각에서는 세 사람 공히 이해 관계가 걸려 있어 ‘오버’한 것 아니냐는 비난도 일었다. 이를테면 유대변인이나 노관규 위원장은 내년 총선에서 각각 이해찬·이부영 의원이라는 거물급 중진 의원을 상대해야 한다. 그러자면 지명도를 높이는 것이 급선무이다. 김경재 의원은 당권, 나아가 ‘호남의 차기 맹주’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실제로 11월28일로 예정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1인 다표제로 대표 경선을 할 경우, 호남의 대표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김의원이 경선에 출마하게 될 것이라고 한 측근은 전했다.

개인을 위해서였건 당을 위해서였건, 세 사람은 쏘라는 신당 대신 엉뚱하게 호남 민심을 쏘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 고 건 서울시장 후보 대변인을 할 때 상대 후보의 흑색 선전에 맞서 유종필 대변인이 남긴 명언이 있다. “흑색 선전은 비아그라와 같다. 절망적 상황에서 한번 일어서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지만, 자칫 스스로 죽는 수가 있다.” 이번 재·보선 결과를 보면 저격수들이 벌이는 폭로전의 운명도 이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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