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회계 장부, 가계부만도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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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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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선 때 필자는 대선유권자연대 대선자금실사팀에 끼어 한 정당의 회계 장부를 볼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지출 내역만 보고 수입 내역은 볼 수 없는 실사 범위의 한계, ‘당신들은 공권력이 아니니, 우리가 내놓은 자료만 보고 곱게 가라’는 국회의원의 은근한 협박, 아니꼽다는 듯이 도끼눈으로 쳐다보는 실무자들. 누가 보아도 크게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정당 회계 실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실사를 시작했다.

수입·지출 ‘단일 계좌’ 사용 의무화 필요

그러나 막상 회계 장부를 본 순간 너무 당황했다. 회계 장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가계부’ 수준이었다. 이것이 연간 1천억원(정당활동비 및 선거자금 포함)을 쓰는 정당의 회계 장부란 말인가? 가장 큰 유세단을 이끄는 후보가 지방 유세 비용을 구멍가게 수준인 민노당 후보보다 적게 신고한 점, 기자들에게 출장 지원금을 지불한 사실이 기자들로부터 확인되었는데도 누락한 점, 외상으로 물건을 구입해 돈이 지출되지 않았으니 선거 비용이 아니라고 우긴 점 등등. 누가 보아도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가계부 수준의 회계 장부 덕분이었다. 순간 필자에게 엉뚱한 상상이 스쳐갔다. ‘이런 데서 몇 년만 회계 실무자로 일하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한밑천 챙길 수 있겠는데….’

정당 회계를 복식 부기로 바꾸어야 한다. 즉, 회계 장부를 가계부 쓰듯이 쓰지 말고, 일반 회사와 같은 방식으로 회계 처리를 해야 한다. 연간 매출이 수억원밖에 안되는 회사도 철저하게 기업 회계 기준에 따라 회계 처리를 하고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다. 그런데, 국민 세금을 1년에 1천억원씩 갖다 쓰는 정당이 ‘가계부’를 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식이라면 1천억원 중 얼마가 정당 일에 쓰였고, 얼마가 개인 주머니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정당에 기업 회계 시스템을 도입하면 회계가 투명해진 만큼 비자금 조성이나 개인이 횡령할 여지는 줄어들게 될 것이다.

또 일정 금액 이상의 후원금 수입은 수표 사용을 의무화하고 기부자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 정당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단일 계좌 사용도 의무화해야 한다. ‘수입-지출=잔여금’, 이것은 초등학교 1학년도 아는 공식이다. 여태까지 거의 모든 불법 정치 자금은 현금으로 조성되었다. 현금 수입은 얼마든지 누락할 수 있으므로 지출도 얼마든지 누락할 수 있다. 따라서 천문학적인 선거 자금을 쓰고도 선거법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수표 사용을 의무화하고 고액 기부자 명단을 공개해 수입을 노출시킨다면, 지출을 누락할 수 없다. 수입이 노출되는데 지출을 누락한다면 통장에 남은 잔여금이 그 거짓말을 곧바로 폭로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건당 100 달러, 프랑스는 1천 프랑 이상의 기부금을 반드시 수표로 사용하도록 하고 있으며, 영국의 경우 2백 파운드 이상의 기부금은 내용을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정치권에서는 100만원 이상의 기부금에 대해 수표 사용을 의무화하고 기부자 명단을 공개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선진국에 비하면 매우 후한 기준이다. 정치권이 이 정도 개선안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정치 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정치권은 국고보조금을 얼마든지 갖다 쓸 수 있는 ‘눈먼 돈’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런 증빙과 내역도 없이 수백만원, 수천만원을 자유롭게 쓸 리가 없다. 일반 기업의 경우 10만원 이상 지출은 정규 영수증으로 처리하고 있다. 정당도 기업 수준의 투명성을 지켜야 한다. 만약, 정규 영수증으로 처리하지 않거나 지출을 누락했을 경우, 그의 10배수에 해당하는 금액을 국고보조금에서 삭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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