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억원’ 미스터리극 개봉 박두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0.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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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15대 총선 때 안기부 뭉칫돈 정치권 이동 확인… YS “나를 겨냥한 음모” 반발
국가정보원(옛 국가안전기획부)의 돈 사정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 한 전직 고위 간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그동안 국정원의 예산이나 쓰임새는 한마디로 ‘성역’이었다. 정부 핵심 인사들조차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되는 기밀 사항이었다. 그런 베일 속의 자금 가운데 일부가 최근 꼬리를 드러내 정치권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

검찰은 지난 10월4일 ‘경부고속철 로비 자금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1996년 15대 총선 직전 당시 안기부의 거액 뭉칫돈이 신한국당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 겸 국회 국방위원장이었던 황명수 전 의원(현 민주당 고문)의 비밀 계좌로 유입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황씨의 비밀 계좌에 들어간 안기부 자금의 물줄기를 거슬러올라간 결과, 안기부 모(母) 계좌에 있던 수백억 원이 여러 차례 세탁 과정을 거쳐 신한국당 총선 후보 100여 명에게 전달된 사실을 포착하고 그 경로를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돈의 규모는 최소 4백억원에 이르며, 후보 1인당 적게는 1억원에서 많게는 10억원까지 전달된 것으로 전해진다.

국정원의 공식 예산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예산안에 국정원 몫이라고 못박힌 ‘공개된’ 예산이고, 다른 하나는 기획예산처 예비비에 편입된 ‘비공개’ 예산이다. 예산을 보면 조직의 규모나 정보력이 단박에 드러나기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든 정보기관의 예산은 비밀로 하는 것이 관례다. 이 때문에 기획예산처 예비비도 총액만 공개하도록 되어 있다(예산회계특례법 제2조). 한 국정원 전직 간부는 “공개된 예산 2천여억원에 기획예산처 예비비 4천억∼5천억 원을 합해 1년에 보통 6천억∼7천억원 정도가 쓰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숨은 예산이 더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나라당 권오을 의원은 국방부·통일부·정통부 등 각 부처 예비비로 잡혀 있는 돈도 국정원 예산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감청기기 구입 같은 대공 업무용 예산이 정통부 예비비로 잡혀 있으며, 이 예산을 책정하는 과정에서 국정원의 입김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권의원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국정원 총예산은 1조원이 넘는다. 이에 대해 국정원측은 ‘각 부처 예비비가 중복 책정되는 것을 막느라 국정원이 1차 심의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산 집행은 해당 부처가 알아서 하기 때문에 국정원 예산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국정원 예산을 가늠치 못하게 만드는 핵심 변수는 바로 국정원이 기업 등을 통해 별도 모금하는 이른바 ‘통치 자금’이다. 정보기관 사정에 밝은 전·현직 정보기관 간부들에 따르면, 통치 자금은 박정희 정권 중반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정부가 시행하는 건설 공사의 사업자 선정권을 모두 중앙정보부가 틀어쥐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공사 수주액의 10~20%를 관례처럼 상납 받아 통치 자금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규모는 5, 6공 때까지만 해도 엄청났으나, 문민 정부를 거치며 줄어들었다는 것이 정가의 정설이다.

이런 통치 자금은 안기부 자체 예산과 뒤섞여 광범위한 의미의 대통령 통치 자금으로 활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 나설 때나 군부대·지방자치단체·사회복지시설 등을 시찰할 때 그리고 각료나 기자 들이 퇴임할 때 금일봉 또는 전별금 형태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다. 청와대 수석들도 통치 자금의 수혜자로 알려진다. 문민 정부 때 청와대를 출입한 한 언론사 간부는 “대통령이 외국에 한번 나가면 공보수석실로만 3억∼5억원 정도의 안기부 자금이 공수됐다고 한다. 또 청와대 직원들은 안기부 돈으로 청와대 담당 안기부 직원들에게 떡값을 준다는 말을 우스갯소리인 양 떠들고 다녔다”라고 전했다.

여권 관계자들은 이런 통치 자금이 국민의 정부 들어 완전히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김대통령이 이종찬 초대 원장에게 돈 문제는 아예 신경을 쓰지 말라고 처음부터 못박았다”라면서, 그 이후 국정원 자금이 청와대로 이동한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인지 DJ나 청와대에 돈이 귀하다는 징후는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 1998년 4월 DJ가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에 참석하려고 외국 순방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출발 직전 ‘과거에는 관행이었다’며 국정원 자금을 들고 온 이강래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을 나무라며 돌려보낸 DJ는, 순방 도중 급히 쓸 일이 생겼다며 박지원 공보수석에게 5만 달러를 빌렸고, 귀국한 후 갚았다. 박씨의 한 측근은 당시 박씨가 빠듯한 경비 안에서 대통령이 돈까지 빌려가는 바람에 상당히 고생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돈 가뭄 때문에 경호팀과 외교통상부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적도 있다. 외국 호텔에서 대통령 경호를 위해 번갈아 밤을 새우던 경호팀이 졸음을 쫓고자 유료 텔레비전을 시청했는데, 그 요금이 만만치 않게 나온 것. 결산을 맡은 외교통상부가 예상치 않은 경비라며 경호실로 떠넘기자 경호실이 발끈했다고 한다. 이렇듯 청와대의 경제 사정이 어렵자 국정원측은 과거처럼 돈을 직접 가져다 주는 대신 청와대가 주관하는 각종 여론조사를 대행하거나, 안보 관계 회의의 소요 경비를 국정원이 부담하는 식으로 간접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상적인 통치 행위 외에 안기부 자금이 대규모로 투입되었다고 의심받는 대목이 또 있다. 바로 이번에 문제가 된 선거 자금 전용 시비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안기부 자금은 사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고, 안기부 계좌는 검찰도 추적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돼 있어 선거 자금으로 전용하기에 가장 안전하다”라고 말했다. 안기부 자체 예산은 물론이고 외부에서 끌어온 돈도 일단 안기부 계좌를 거치면 확실하게 세탁되기 때문에 법망을 쉽게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와 관련해 전직 안기부원 정인영씨는 1998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1996년 안기부 예산 중 1천62억원이 정치 자금으로 전용된 의혹이 있다”라고 폭로한 적이 있다.

이런 증언들은 최근 검찰이 발표한 안기부 자금의 정치권 이동설을 뒷받침한다. 문제는 검찰 수사가 과연 어디까지 진행되느냐다. 만약 수사 결과 안기부 자금이 총선에 쓰였고, 돈을 받은 신한국당 후보들이 줄줄이 드러날 경우 정치권에 메가톤급 폭풍이 일 것으로 보인다.

당장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당시 신한국당 총재였던 YS는 “김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폭탄 선언을 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번 검찰 수사가 반 김정일 운동과 민주산악회 재건 운동을 벌이고 있는 자신에 대한 흠집내기용이라는 의심 때문이다. 신한국당 출신들이 대다수인 한나라당도 야당 탄압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빛은행 사건을 희석하려는 여권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당치도 않다는 반응이다. 영수회담 등 모처럼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고, 전략적으로만 보면 YS가 한나라당과 갈등을 빚는 것이 유리한 마당에 굳이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있겠느냐는 얘기다. 이 때문에 정치권 일부에서는 특검제를 추진하고 있는 정치권에 검찰이 경고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는 실정이다.

검찰은 고속철 로비 사건을 일단 마무리한 후 안기부 자금 수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역대 정권을 거치는 동안 여러 차례 편린만 남겼던 안기부 자금의 실체가 이번에는 전모를 드러낼지, 아니면 또다시 꼬리만 남기고 사라지는 도마뱀 꼴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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