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민주당이여 영원하라”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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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과 총선 맞대결 피하려고 민주당 응원… “환골탈태 없는 어부지리 전략은 실패한다” 비판도
“조순형 대표가 탁월한 인품과 폭넓은 경륜을 바탕으로 민주당을 진정한 야당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할 것으로 기대한다. 민주당의 건승을 기원한다.”

민주당 당원의 말이 아니다. 한나라당 박 진 대변인이 지난 11월28일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난 직후 발표한, ‘민주당의 새출발을 축하한다’는 논평의 한 토막이다. 지난 11월11일 열린우리당이 창당대회를 치렀을 때, 박대변인이 아무런 논평을 내지 않고 무시하는 전략을 취한 것과 사뭇 대비된다.

한나라당에서 공개적으로 조대표를 극찬한 사람은 박대변인뿐이 아니다. 사무총장이자 비상대책위원장인 이재오 의원도 11월28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이렇게 말했다. “조의원은 의회주의를 지킨 올곧은 정치인 중 몇 안되는 사람으로 여야 간에 신망이 두터운 분이다. 앞으로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좋은 야당으로 함께 정치를 해주기를 기대한다.” 민주당측의 거부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이의원은 11월30일 오전 당선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조대표를 방문할 생각까지 했었다.

“자민련과 척 지지 않고 3자 대결하면 필승”

민주당 전당대회에 한나라당은 홍사덕 총무를 보냈다. 이재정 총무위원장을 보낸 열린우리당에 비해 한 단계 격이 높았다. 11월 한 달 동안 한나라당이 낸 논평을 살펴보아도 민주당을 꼬집는 내용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반면 ‘남의 잔칫날에 초치는 노대통령’ ‘낮엔 무당적 대통령, 밤엔 열우당 총재’ 등 제목만 보아도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비판하는 논평은 즐비하다. 한나라당이 의식적으로 민주당 살리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들이다.

한나라당이 민주당을 ‘관리’하는 데 남다른 노력을 쏟는 이유는 노대통령 말대로 기본적으로 선거는 구도가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간발의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수도권의 경우 전체 선거판이 어떻게 짜이느냐, 이슈를 누가 장악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다. 현재 수도권 의석 수는 전체 지역구 의석(2백27석)의 3분의 1이 훨씬 넘는 97석이다.

한때 한나라당 안에서 ‘자민련 합당론’이 불거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노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 나오면서 가라앉았지만, 한나라당 충청권 일부 의원은 대선 패배 이후 은밀히 자민련과 합당하기 위해 움직였다. ‘나라를 살리기 위한 보수 세력 대통합’을 명분으로 내걸고, 영남과 충청 세력이 연합해 노무현 정권을 총선에서 심판하자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권력 구조 변경에 대한 막후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표는 평소 지난 대선에서 패한 제일 큰 원인을 ‘JP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왔다. 수도권에 있는 충청 출신 유권자는 대략 20%. 자민련과 합당을 반대하는 한나라당 의원들도 이 표를 의식해 자민련과 등을 돌리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한나라당은 자민련과 척을 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나라당·열린우리당·민주당이 수도권에서 각축하는 3자 구도가 최상이라고 본다.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 어느 한쪽으로 세가 몰려 한나라당과 맞대결하는 구도로 싸움이 벌어지는 상황은 상상하기 싫은 것이다. 한나라당은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노대통령을 등에 업은 열린우리당의 ‘민주당 죽이기’ 공세가 치열해질 것으로 본다. 노대통령이 호남 지역을 몇 차례 방문하고 ‘김대중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하는 등 호남 민심을 다잡아 내년 총선 구도를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맞대결 구도로 끌어가려는 순서에 돌입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나라당 한 핵심 당직자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지지 계층은 중복되는 측면이 많다. 민주당의 힘을 빼서는 안된다.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서라도 3당이 공존하는 구도로 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수도권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현재 구도가 내년 총선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두 달 사이에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당 지지도가 한나라당-민주당-열린우리당 순으로 굳어지는 흐름이 뚜렷하다. 대체적으로 한나라당은 20%대 중반,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10%대 중·후반에 머물러 있다. 가장 최근인 <한겨레> 조사(11월19일)에서는 한나라당 23.7%, 민주당 18.2%, 열린우리당 11.7%로 나왔다.

그러나 변수는 있다. 검찰 수사에서 한나라당 대선 자금과 관련해 어떤 사안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내부 개혁 과정에서 세력이 갈라질 가능성도 있다. 전남·전북과 달리 호남의 중심이라는 광주에서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을 6.7% 포인트 앞지른 것(한국사회여론연구소 11월17일 조사 결과)도 눈길이 가는 대목이다. 정대철 열린우리당 상임고문과 민주당 설 훈 의원 등을 중심으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재통합’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이처럼 3당 역학 구도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역동성을 가진 것이 현재 정국의 특징이다.

한나라당·민주당 공조 가능성은 적어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어떤 방법으로 3자 구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직 이와 관련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최대표의 한 측근은 조만간 다양한 방안이 마련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측근은 “3자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이 다소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안 사안마다 최대한 명분을 줘 민주당이 주도권을 쥐고 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한나라당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의결 불가’를 외쳤던 한나라당은 이미 특검법 문제와 관련해 민주당이 주도적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고 한나라당이 마지못해 동조하는 모양을 취하며 재의결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한나라당의 ‘후원’에 힘입어 민주당이 정국 현안에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는 ‘민주당 역할론’이 빠르게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공 게임이 앞으로 ‘한나라당·민주당 공조’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에 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소장 김헌태)가 11월17일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공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응답자가 65.3%에 달했다. <한겨레> 11월19일 조사에서도 잘못하는 일이라는 응답자(47.6%)가 잘하는 일(36.4%)이라는 응답자보다 많았다. 특히 민주당을 지지하는 호남 유권자들 사이에 한나라당과 공조하는 데 대한 반감이 크다.

한나라당 안에서도 지난 대선 때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회창·노무현·정몽준 3자 구도로 대선이 치러질 것으로 보고 안주하다가 막판에 단일화가 이루어지는 바람에 손도 써보지 못하고 패했다는 것이다. 여권이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했으니 한나라당이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다는 분석은 위험천만하다며 경계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 구도의 향방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나라당의 정체성과 개혁 여부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특검법이 재의결되어 노대통령 측근들이 특검에 불려 다닌다고 한나라당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한나라당의 쇄신 여부에 내년 총선의 승패가 달려 있다고 본다. 최대표 측근인 윤여준 의원과 남경필·원희룡 의원 등 소장파의 생각이 이렇다.

홍준표 전략기획위원장도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전략에 집중하면 대선 때의 재판이 될 수 있다. 당을 환골탈태해 국민들로부터 새 모습으로 거듭났다는 신뢰를 얻어야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 어부지리 전략으로 가면 곤욕을 치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눈 밝은 이들은 총선을 앞두고 당에 또 한번 커다란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전망한다. 존립 기반이 흔들려 당명을 바꾸고 당사를 팔아치우며 완전히 새로운 당으로 태어나야 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갖고 있다. 재계를 거친 검찰 수사의 칼끝이 결국 한나라당을 겨누는 마당에, 내우외환을 한꺼번에 극복할 유일한 방법은 혁명적인 내부 혁신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이들은 ‘문제는 구도나 상황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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