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중진들“낀 세대는 괴로워”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01.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야 중진들, 물갈이 대세·1인 보스 체제에 설 자리 잃고 끙
낀세대의 고민. 얼마 전까지 기승을 부리던 세대론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권의 낀 세대, 중진들의 이야기다. 자고로 지금처럼 여야 중진들이 어중간한 처지에 빠진 적은 없었다. 지분을 얼마나 챙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중진이라면 행복한 편이다. 물갈이론에 시달리는 중진, 자기 한 몸 당선에 정치 생명을 걸고 있는 중진, 지역 구도의 희생양이 되어 정처 없이 떠도는 중진 등등. 여야 각당의 중진들은 목하 고민 중이다.

물론 예전에도 몇몇 ‘황제급’ 정치인들이 정국을 요리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때도 소규모 봉토를 가진 ‘제후급’ 정치인의 설 자리는 항상 보장되어 왔다. 그런데 지난 대선 이후 그런 계급 질서가 깨져 버렸다. 여야 모두 ‘총재를 향해 앞으로 나란히’만 하고 있다. 정치는 총재와 초·재선 의원들의 몫이었고, 중진들은 개입할 틈이 없어져 버렸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정치가 실종되었다고 한탄하는 중진들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리기는 했지만, 사후 약방문이다.

여하튼 정치권의 중진 바로 서기는 이번 총선에서도 어려울 모양이다. 이번 총선은 중간 평가 성격을 띠고 있어서 여야가 총력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 얘기는 이번 총선도 사령관들의 싸움이지 중대장들의 싸움은 아니라는 말. 사령관과 새로 투입된 신참 병사들이 주도하게 될 것이 뻔하고, 중대장들은 2선이 제자리다. 물론 각당의 사정에 따라 중진들의 처지도 천차만별이다.

여권 중진의 고민을 가장 집약해 보여주는 인물이 국민회의 김상현 고문(서대문 갑). 작년 말 무죄 판결을 계기로 정치 활동을 재개한 김고문은 이번 총선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젊은 피의 대표 주자인 우상호 민주당 부대변인이 김고문의 지역구에 공천 신청을 하자 그는 뜻밖의 복병을 만난 셈이 되었다. 그는 특유의 발로 뛰는 전법으로 위기 탈출을 모색하고 있으나 구시대 정치인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고른 전법이 맞불 작전. 그는 자신의 색깔을 환경 정치인으로 바꾸고, 1월 중에는 지식인 등 5백여 명을 동원해 ‘김상현을 사랑하는 모임’을 꾸릴 계획이다. 현재 고 은·신경림·김용태·최 열 씨가 지지 선언 대열에 동참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예선을 통과하더라도 본선이 문제다. 지난 총선에서 6백여 표 차이로 떨어진 한나라당 이성헌 위원장이 버티고 있어 그로서는 산 넘어 산이다.

김봉호 국회 부의장도 앞날이 불확실한 여권 중진 중 한 사람. 그는 1월5일 대통령을 면담한 뒤부터 표정이 밝아져, 무슨 언질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자신의 지역구(전남 해남·진도)에 공천 신청을 할 것으로 알려졌던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이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써 한 고비는 넘겼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그도 아직 기사회생 단계는 아니라는 것이 중평이다. 김홍일 의원과 함께 호남 지역 물갈이의 상징적 대상이라는 점이 끝까지 그를 괴롭히는 약점이다. 제 한몸 지키기도 버거워

유력한 차기 주자로 거론되던 이종찬 부총재는 요즘 격세지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는 “국민에게 심판을 받아 떨어진다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라고 배수진을 쳤다. 당선만 된다면 언론 문건 사건 때문에 구긴 체면도 살리고 정치인으로 재기할 수 있지만, 낙선한다면 그의 말대로 은퇴해야 할지 모른다. 정치 생명을 걸고 총선을 준비하기는 정대철 부총재도 마찬가지. 경성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은 그에게는 이번 총선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 될 전망이다.

김원기 상임고문(전북 정읍)도 이번 총선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 그는 DJ를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 간판으로 나선 지난 총선에서 표적 공천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절치부심 4년. 대선 직전 통추를 이끌고 국민회의에 합류함으로써 주류 대열에 복귀했지만, 아직 완전히 ‘복권’된 것은 아니다. 지역구 공천은 DJ의 완전한 신임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이다. 그러나 상대는 동교동계 윤철상 의원.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밖에도 조세형 상임고문(광명 을)은 손학규 전 의원을 상대로 힘겨운 한판이 예상된다. 김영배 상임 고문(양천 을)도 한나라당의 표적 공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조·김 고문은 본선을 통과하기만 하면 국회의 요직에 중용될 것으로 점쳐지는 중진들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자민련 중진들의 처지를 비유하면 그렇다. 이들의 특징은 ‘정치 생명 담보파’가 많다는 것이다. 합당이 무산되면서 수도권 중진들은 살아 돌아오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고, 영남권 중진들은 살 수 있는 방법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이한동 고문이 자민련으로 옷을 갈아입고 보수 대연합 기치를 들었지만 수도권의 표심이 기대만큼 움직이는 기미는 아직 없다. 이것이 수도권 자민련 의원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연합 공천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적고, 설사 성사되더라도 경쟁력이 약한 자민련 의원들이 낙점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한영수 부총재(서울 양천 갑)는 합당이 무산되면서 수도권에서 여권이 최소 30 석 이상을 놓쳤다고 걱정했다. 자신이 당선될 가능성 역시 ‘합당하면 90%, 지금은 10%’ 선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비례 대표로 옮길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한다.

대구·경북의 자민련 의원들도 마찬가지. 박철언 부총재(대구 수성 갑)는 현재 대구·경북 의원 및 영남권 원외 위원장 들과 거취를 놓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그는 만약의 경우 자민련 둥지를 떠날 것까지 고려하고 있다. “마음의 문을 닫지 않고 있다”라는 표현으로 그는 자신이 탈당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최근 이수성 민주평통 수석 부의장·김용환 의원 등과 접촉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야당 중진들의 ‘배부른’ 고민

반면 주로 영남권에 몰려 있는 한나라당 중진들은 물갈이나 당락에 따른 고민에서는 벗어나 있다. 현역 물갈이도 거의 없을 전망이다. 수도권에서 거취가 달라질 수 있는 의원은 서정화 의원(서울 용산) 정도다. 이회창 총재의 측근인 진 영 변호사가 서의원의 지역을 노리고 있어 공천 전망이 밝지 않다. 이총재 측근들은 ‘서의원은 비례로 옮기는 것이 낫지 않으냐’는 말을 흘리고 있다. 이에 대해 서의원도 어느 정도 용인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런 홀몸 중진에 비해 계보를 거느린 중진들은 고민이 많다. 김윤환 고문은 대구·경북 지역 의원들의 송년 모임에서 이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세력이라며 TK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TK 지역 공천에 자신의 영향력을 관철하겠다는 의지도 확고하다.

합당 때 30% 지분 약속을 받았던 이기택 고문은 최근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부산 지역 몇몇 인사만은 끝까지 챙긴다는 전략으로 돌아섰다. 그가 미는 계보 인사는 손태인 해운대·기장 갑 위원장을 비롯한 7명 정도. 그러나 부산은 선거법 개정 여부에 따라 최소 4개 정도 지역구가 없어질 전망이어서 그의 의지가 관철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계보 관리와는 별도로 이고문 자신의 지역구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동래 을 출마를 고려하는 이고문은 강경식·박관용 의원 등 거물들과 겨루어야 할 처지다. 더구나 YS가 집권 시절 재경부장관이었던 강경식 의원을 당선시키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힌 상태여서 이고문은 한마디로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허주와 이기택 고문이 공천과 관련한 발언을 계속해 온 것과 달리 이회창 총재와 ‘개혁연대’를 맺어온 김덕룡 부총재는 지금껏 침묵을 지켜 왔다. 그러나 김부총재도 최근 자신이 주도해온 ‘제2 창당’ 작업이 이총재측 반대로 제동이 걸리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도 최근 1차 조직책 선정에 자신의 계보원을 2명 포함시키면서 계보 관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난해 말 이회창 총재가 계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혀 한나라당 중진들의 계보 챙기기에도 먹구름이 일고 있다. 공천권 행사를 놓고 주류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 이것이 다른 당 중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배부른’ 한나라당 중진들의 고민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