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팽풍''앞에 선 충청권 민심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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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충청 민심 현장 르포/자민련, JP 붐 일으키기 안간힘
“김용은씨는 취재했어요?”

“누구요?”

“청와대와 민주당의 음모에 항의하며 자살을 기도한 분이요. 연락처 드릴까요?”

“몇 번입니까?”

“0451-634-○○○○.”

자동이다. 취재 여부를 확인하고 연락처를 가르쳐 주기까지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자민련의 한 지구당사에서 경험한 일이다. <시사저널 designtimesp=10040> 취재팀이 들른 대전·충남 6개 지역의 자민련 사무실 가운데 네 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 충남 홍성 출신 자민련 당원인 김용은씨(56)는 1월24일 음독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유서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경제 업적을 평가하시며 한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인권 지도자이신 김종필 명예총재님께 은퇴 운운 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썼다. 홍성의 한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그는 현재 자민련의 ‘투사’로 널리 선전되고 있다.

1월27일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자민련의 헌정질서수호 결의대회에서도, 김씨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투사’가 속출했다. 당원 여러 명이 삭발했고, 혈서를 쓰기도 했다. 이런 사실 또한 이 지역의 지구당 보도자료철에 잽싸게 오르고 있다. 자민련은 지금 ‘투쟁’을 선동하는 중이다. 효과는 예상보다 빠르다.

총선까지 남은 기간은 70일 남짓. 예년 같으면, 적어도 충청도에서라면 아직은 선거 바람이 불 때가 아니다. 선거 사나흘 전까지는 자식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 충청도 민심의 특징. 그러나 총선시민연대가 발표한 공천 반대 대상자 명단에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가 포함된 것을 계기로 대전·충남 지역에는 ‘너무 이른’ 선거 바람이 불고 있다. 이번 바람의 종류는 ‘팽(烹)풍’. 1996년의 ‘핫바지풍’과 비슷하게 ‘JP가 또 팽당했다’는 여론몰이가 시작된 것.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진원지는 자민련이다.


‘음모론’은 자민련의 충청권 석권 전략

자민련이 ‘팽풍=음모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민련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를 맴돌고 있다. 수도권과 TK 지역에서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믿는 곳은 오직 충청권뿐. 더구나 선거구가 조정되어 충청권은 이전의 27개 선거구가 23개로 줄었다. JP의 영향력이 확실하게 미치는 대전·충남 의석 수는 16석. 이곳을 석권하지 못하면 교섭단체를 구성할 20석을 획득하기가 어려워진다. 공동 여당 유지는 물론 정당의 존립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마저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공동 여당으로 정권에 참여했지만 충청도를 위해 한 게 없다는 비판이 일었다.”(자민련 대전시지부 관계자) “JP가 먼저 내각제 연기 발언을 하는 바람에 지역에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한국신당 김창영 대변인) “자민련 의원 중 변변한 인물이 거의 없다.”(한남대의 한 교수)

연초까지 지역 여론은 대강 이런 수준이었다. 자민련으로서는 한마디로 ‘충청권에서 반타작도 못할 정도’(대전 지역 일간지 기자)로 위기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최후의 카드가 ‘음모론’을 통해 지역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음모론의 초기 약발은 어느 정도 듣는 듯하다. 대전역 근처에서 만난 40대 남자는 “충청도도 이제 한 번은 (정권을) 잡아야 푸대접이 없어진다는 여론이 높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런 목소리는 곳곳에서 들린다. “그 양반이 참 안되었어요”라며 JP 동정론을 펴던 대전시 원동 중앙시장 안의 커피숍 주인 ㄱ씨(49·여)는 “자민련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음모론은 믿는다”라고 말했다. 인근에서 옷수선 가게를 하는 이상곤씨(39)도 “오히려 잘된 일이죠. 자민련이 다시 뭉칠 계기가 되었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라고, 변하고 있는 바닥 민심을 전했다.

이런 민심 변화는 JP의 고향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노골적이다. “YS는 머리가 둔해서 JP를 이용도 못하고 토사구팽시켰는데 DJ는 머리가 좋아서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팽시켰다.”(부여지구당 간부) “DJ가 누구 덕분에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습니까.”(자민련 당원) 부여 읍내에서는 이런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자민련이 주장하는 음모론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과연 충청권 민심은 JP를 다시 한번 부활시킬 것인가. 지역 신문인 <홍성신문 designtimesp=10058> 윤두영 전무는 ‘지역 감정이 작용하고 있으나 아직은 인물론이 대세’라고 JP 바람이 다시 일 가능성을 부정했다. 여론 주도층이 JP에게 냉담하다는 점도 자민련에게는 부담이다. 이욱연 교수(영동대)는 지역 감정 선동이 우려할 만한 상황이지만, 대중적으로 확산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유동민 교수(충남대)도 “지역 감정을 볼모로 선거를 치르겠다니 안타깝다”라면서 자민련을 비난했다.

그러나 아직은 잠복 중일 뿐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지역 감정이 최대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점에는 대다수 사람이 동의한다. <중도일보 designtimesp=10061>가 연초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 중 가장 많은 수(29.2%)가 지역 감정을 최대 변수로 꼽았다. 지역 감정 바람은 아직은 충남 남부 지역에서만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나 북부 지역에까지 번질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 일선 기자들의 분석이다. 대전 서구 갑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를 준비하는 안재휘씨는 “JP가 강할 때는 버리고, 힘이 빠질 때는 챙겨주는 것이 지금까지 충청도 민심이었다”라면서, JP 바람이 이번에도 충청권 전역을 휩쓸 것이라고 우려했다.


총선시민연대 명단 발표 최대 수혜자는 JP?

자민련도 지역 감정을 총선 전략으로 삼고 있음을 애써 숨기지 않는다. 자민련 대전시지부의 한 간부는 “이번 팽 바람을 선거 때까지 끌고 갈 수 있느냐가 충청권을 석권하는 데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자민련은 서울에 이어 대전에서도 헌정질서수호 결의대회를 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대전의 한 자민련 지구당 관계자는 김용은씨처럼 몸을 바칠 사람이 많다고 했다. JP 바람을 살리기 위해 자민련은 똘똘 뭉쳐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자민련을 제외한 정당들은 긴장하고 있다. 15대 때 자민련 바람 때문에 이 지역에서 참패했던 한나라당은 이번에는 내심 설욕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초긴장 상태. 한나라당 이재환 대전시지부장은 지역 감정을 조장하는 것이 비열하다면서도 ‘대전 지역 최소 3석’으로 잡은 목표가 힘들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민주당 대전시지부와 충남도지부는 며칠째 빗발치는 전화로 몸살을 겪고 있다. 대부분이 항의 전화다. 엄기포 민주당 대전시지부 대변인은 “이인제 선대위원장의 ‘교도소‘ 발언까지 이어져 민주당은 설 땅을 더 잃었다”라고 하소연했다. 최근 민주당 당직 인선에서 충청권 인물들이 소외되자 민주당 관계자들의 근심은 날로 쌓이고 있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이번 명단 파문으로 대전·충청 지역에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것은 김용환 의원이 이끄는 한국신당이다. 연초까지 일정하게 유지되던 지지율이 JP 동정론이 확산되면서 곤두박질하고 있는 것. 한국신당 김창영 대변인은 명단이 발표되어 가장 득을 본 것이 자민련과 JP라면서, DJP 합작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전의 총선 판도는 현재 ‘1강 1중 1약’이라는 것이 이 지역 언론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자민련과 한나라당의 2강 체제에서 자민련 독주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
인물이냐 바람이냐, 자민련의 딜레마

그러나 자민련도 나름으로 어려움은 있다. JP가 명단에 포함되면서 JP 바람을 일으킬 근거는 만들었지만, 대신 물갈이는 똑같은 이유로 어려워졌다는 것이 이 지역 자민련 관계자들의 고민이다. “JP 바람을 동원하자니 인물이 처지고, 인물을 갈자니 음모론 역풍을 일으킬 명분이 죽는다.” 한 지역 간부는 이렇게 자민련의 고민을 압축해서 털어놓았다.

공주에서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는 자민련 정진석 위원장의 고민도 비슷하다. <한국일보 designtimesp=10080> 기자 출신인 정위원장은 자민련의 충청권 후보 중 유일하게 ‘젊은 피’ 주자로 꼽힌다. 맞상대인 한나라당 이상재 위원장과 겨루기 위해서도 참신성과 깨끗함을 무기로 선거운동을 펼칠 수밖에 없다. 총선시민연대 등 시민단체의 활동에도 심정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당의 색깔과 자신의 이미지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 이동진 보좌관은 “시대 정신에 부합하는 참신한 인물임을 강조할 계획이지만 당의 선거 전략과 달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런 자민련의 약점을 파고들면서 인물론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작전이다. 두 당이 ‘인물 우위’를 내세우며 넘보고 있는 지역은 유성과 대덕. 유성과 대덕은 주민의 3분의 2가 고학력층이거나 다른 지역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어 자민련 바람이 거세지 않다는 지역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유성(자민련 조영재 의원)에서 민주당 출마가 유력한 인사는 송석찬 유성구청장. 송구청장은 자민련 텃밭에서 국민회의 간판으로 구청장에 당선된 인물로 지역 관리를 잘해 당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민주당의 분석이다. 한나라당은 대덕(자민련 이인구 의원)에서 김원웅 전 의원을 영입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씨는 ‘무지개 연합’이 깨진 이후 무소속과 한나라당 중 어느 쪽을 택할지 고심하고 있다.

대전은 그나마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 세 군데 이상을 경합 지역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충남으로 건너가면 상황이 다르다. 충남은 자민련의 독무대가 되리라는 것이 이 지역 언론의 분석. 자민련은 충남 전지역 석권을 자신하면서 이인제씨 출마설이 나돌고 있는 논산과 김용환 의원이 버티고 있는 보령 정도만을 경합 지역으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논산, 한나라당은 천안 갑 정도만을 ‘우세 지역’으로 점찍고 있을 뿐이다.

논산(자민련 김범명 의원)은 이인제씨의 출마 여부가 변수이다. 이인제씨를 지지한다는 박정례씨(약국 경영)는 “지역 인물을 키우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라면서 민주당의 우세를 장담했다. 자민련 김의원도 이같은 사실을 받아들이며 긴장하고 있다. 논산 외에 민주당이 가능성을 엿보고 있는 지역은 서산·태안(자민련 변웅전 의원). 호남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이 민주당에게는 강점이다. 그러나 이곳도 최근 JP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어 자신할 수는 없는 지역. 문석호 변호사가 민주당 간판으로 출전 준비를 하고 있다.

자민련의 2인자에서 지금은 자민련의 공적(公敵)으로 바뀐 김용환 의원이 버티고 있는 보령은 자민련의 충남 석권에 가장 확실하게 걸림돌이 되는 지역이다. 그러나 선거구가 조정되어 인근 서천과 합쳐지게 됨에 따라 김의원도 자민련 이긍규 총무와 힘겨운 한판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위 인터뷰 기사 참조).


북부 지역은 아직 ‘미풍’

충남 남부 지역에 비해 북부 지역의 JP 바람은 아직 미풍이다. 한나라당이 집중 공략하려는 지역도 이곳이다. 한나라당이 기대하고 있는 지역은 천안 갑(자민련 정일영 의원)과 예산(자민련 오장섭 의원) 등 두 군데. 천안 갑은 성무용 전 의원의 출마가 확정적이고, 예산은 김성식·최승우 씨가 공천 경합을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 성무용 위원장은, 천안이 수도권과 가깝고 유동 인구가 많아 JP 바람이 거세게 불지는 못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천안경찰서 정보과 ㅁ형사는 설 연휴가 지나 보아야 JP 바람의 강도가 드러날 것이라며 판단을 유보했다.

이들 지역 외에는 충남 북부 지역에서도 자민련이 독주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물론 이들 지역도 JP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다. 15대 때 ‘핫바지론’ 덕분에 자민련은 대전·충남 지역 19개 선거구 중 18개를 휩쓸었다. 이완구 의원(청양·홍성)이 한나라당 후보로 유일하게 당선되었지만 당선 직후 자민련에 입당함으로써 15대는 사실상 자민련이 석권했다. 자민련은 이번에도 15대 때와 같은 바람을 기대하면서 음모론을 열심히 펌프질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채 확산되고 있는 음모론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까? 충청권에서는 물론 자민련이지만, 전국적으로는 한나라당이라는 것이 정가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음모론이 확산되고 공동 여당 간에 틈이 생길수록 수도권의 충청 출신 표는 분산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이 어부지리를 취할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음모론의 최대 피해자가 민주당이라는 점도 마찬가지 논리로 설명된다. 시민단체들은 정치 개혁과 물갈이를 겨냥했지만, 그 화살은 지역 감정이라는 엉뚱한 과녁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것이 우리 현실 정치의 ‘비극적인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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