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판 ‘막가파’브로커들이 날뛴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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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벌룬 등 수법 다양…‘프로’보다 내부 브로커가 더 문제
“만나는 사람마다 모든 것을 돈과 연결하는 것이 곤혹스러웠습니다.” 윤방부 연대세 의대 교수가 한나라당 서울 노원 을 지역 공천을 반납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유세장에 사람을 붙잡아 앉혀 두는 것에서부터 지역구에 인사 다니는 것까지 선거 브로커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왜곡된 구조를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도 말했다. 윤교수는 우리나라 선거판의 생리를 너무 빨리 알아버렸고, 그래서 시작도 하기 전에 손을 털었다. 민병철 중앙대 겸임교수도 민주당 강남 을 지역 공천을 받았으나 비슷한 이유로 사퇴했다.

늘 그랬듯이 이번 4·13 총선에서도 선거 브로커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여의도 주변에는 브로커들이 접근했다거나 이들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떠돌고 있다. 3월 초에는 강민혁이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가 ‘선거를 앞두고 직접 손대기 껄끄러운 일이 있으면 제게 맡겨 주십시오’라는 전자 우편을 국회의원 20여명 앞으로 보낸 일까지 있었다.

경기 북부 지역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은 ㄱ씨는 산악회 간부를 빙자한 선거 브로커 3명으로부터 평균 천만원씩을 요구받았다고 밝혔다. 경기 남부 지역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ㄴ씨도 “공천을 받자마자 15대 총선 때 동책을 맡아 수백명을 관리했다는 선거 브로커들이 접근해 돈을 요구했으나 거절했다”라고 말했다. 경북 지역의 한 한나라당 현역 의원은 “전직 수협 간부를 자처하는 지역구 인사가 천여명의 명단을 내밀고는 다짜고짜 2천만원을 요구했다”라고 사례를 소개했다.

중앙선관위는 3월12일 현재 16대 총선과 관련한 선거법 위반 혐의로 1천99건을 단속해서, 이 중 57건을 사직 당국에 고발했고 44건을 검·경에 수사 의뢰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선거 브로커 혐의로 적발된 경우는 없다. 선거 브로커들이 워낙 은밀하게 활동하는 데다 피해자들이 후환이 두려운 나머지 신고나 제보를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브로커들은 후보를 당선시킬 표를 몰아주지는 못해도 음해성 소문을 퍼뜨려 낙선시킬 수는 있다.” 브로커를 신고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한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동대문 을 지역에 출마하는 민주당 386 세대 후보인 허인회씨는 “아직 브로커가 접근해 오지는 않았지만 막판에 가면 상대방이 브로커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지난 지방 의회 선거에 출마했던 ㄷ씨의 측근은 “선거 이틀 전 50∼2백 표씩을 가지고 있다며 찾아온 3∼4명에게 선거 브로커라는 의심이 들면서도 돈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라고 고백했다. 선거운동원과 브로커 ‘물 반, 고기 반’

이런 선거 브로커들은 주로 여야 정당의 공천 발표를 전후해서 한 차례 나타났다가 잠시 잠잠해지고는 선거 막판이 되면 다시 기승을 부린다. 그러나 선거 양상이 치열해지고 후보들이 초조감을 드러내는 선거 막판이 아니라면 이들에게 당하는 후보자는 별로 없다. 조직이 워낙 취약한 일부 무소속을 제외하면 정당 후보들은 선거 브로커에게 실제로 당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지적했다.

문제는 이런 노골적인 선거 브로커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 인근에서 민주당 후보로 3선에 도전하는 ㄹ의원은 선거 브로커가 선거운동 조직 안에 더 많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도 선거운동원들 중에서 순수 선거운동원과 브로커 성향 선거운동원이 반씩 섞여 있다고 보면 된다고 언급했다. 실제 현장에 가면 운동원과 브로커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애매한 경우도 많다는 것이 선거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13∼15대 동안 총선 세 번, 지방자치단체 선거 한 번 등 선거를 네 번 옆에서 지켜본 국회의원 보좌관 ㅁ씨는 선거 브로커를 여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가 경험을 토대로 하여 나눈 유형을 보면 애드벌룬형·몸값 올리기형·공중전화형·건달형·사이비 유권자형·공갈형이 있다. 이 중 마지막으로 거론한 공갈형 브로커만이 흔히 언론에서 지적되는 ‘진짜 브로커’일 뿐 나머지는 해당 지구당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당 일에 관여해온 사실상의 내부 브로커라는 것이 ㅁ씨의 진단이다. ㅁ씨의 분류에 따라 각각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애드벌룬형 브로커들은 먼저 출마설을 흘린 다음 불출마를 조건으로 돈이나 자리를 요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박빙인 지역에서는 이들이 출마해서 3천∼4천 표만 가져가도 승패가 달라질 수밖에 없어 후보들이 이들의 요구를 뿌리치기 어렵다는 점을 노리는 수법이다. 경기도에서 출마하는 민주당 후보 ㅂ씨의 지구당 사무실 벽에는 그 지역에서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사람의 불출마 성명서가 붙어 있다. 사무실 관계자는 ‘한 건 겨우 수습했다’면서 성명서를 가리켰다. 애드벌룬형 브로커의 수법이 통한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인 몸값 올리기형 브로커들은 주로 지역의 기초 의원이나 지구당 주변 유력 인사들인 경우가 많다. 후보들은 지역내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이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데, 이들은 그 틈을 비집고 몸값을 높이려고 흥정하는 것이다. 이들은 흥정 대가로 돈에서부터 이권 개입, 자리 보장까지 다양하게 제시한다. 서울에서 출마하는 한 386 세대 후보는 지역내 구의원 2명이 조건을 ‘세게’ 부르는 바람에 아직까지 곤란을 겪고 있다.

세 번째 유형은 공중전화형 브로커인데, 사실상 대다수 지구당 관계자들이 조금씩은 여기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끊임없이 돈을 투입해야 돌아가는 현재의 비대한 지구당 조직이 공중전화형 선거 브로커를 양산하는 주범이기도 하다. 경기도에서 출마하는 한나라당 후보 ㅅ씨는 회의 때마다 돈타령을 하는 지구당 간부들 때문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 ‘조직이 가동되지 않아 큰일났다’거나 ‘조금만 더 쏘면 될 텐데’라면서 끊임없이 돈을 쓰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위기감을 한껏 조성하면서 돈을 풀게 만드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네 번째는 동네 건달형 브로커들이다. 15대 총선 때 전남의 남쪽 도시에서 출마해 당선한 민주당 ㅇ의원은 ‘열심히 뛰고 있는데 기름값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협박하던 그 지역 ○○전우회 회장에게 3백만원을 뜯겼다. 15대 총선 때 경기도의 한 도시에서 출마했던 한나라당 ㅈ의원은 경호를 맡으며 상대 후보의 부정 선거를 감시하겠다고 찾아온 동네 ‘조직’의 보스에게 여러 차례 ‘관리비’를 집어주어야 했다. 이들이 여관을 잡아 단체로 합숙하면서 먹고 마시는 바람에 관리비가 많이 들었다고 ㅈ의원측은 전했다.
노골적으로 브로커 영입하는 후보도

다섯 번째 유형은 사이비 유권자형 브로커인데, 이들은 다른 유형에 비하면 ‘잔챙이’이다. ‘계원 모임이 있는데 와서 인사나 하라’는 연락을 받고 가보면 음식값 영수증을 불쑥 내미는 식이다. 그러나 아는 얼굴이 끼어 있게 마련이고, 대부분이 지역구 주민들이어서 거절하기가 난처하다는 것이 이런 일을 당한 후보들의 공통된 호소이다. 계모임·동창모임이 주종인데, 요즘은 주식 바람을 타고 증권사 객장 친목 모임까지 등장했다.

그 중 일부는 지구당에서 받은 명함을 이용해 후보측 관계자를 사칭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민주당 성남 중원지구당(위원장 조성준 의원)처럼 ‘사칭파’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명함에 아예 자신들의 얼굴을 인쇄해서 가지고 다니는 간부들도 생기고 있다.

마지막인 공갈형 브로커들이 흔히 말하는 선거 브로커이다. 경기도의 한 지역에서 출마하는 민주당 ㅊ의원은 15대 총선 때 지역에 사는 김 아무개씨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ㅊ의원은 ‘1000표를 동원할 수 있다’ ‘상대 후보의 비리를 가지고 있다’면서 노골적으로 접근해온 김씨를 뿌리치기 위해 모진 애를 썼다. ㅊ의원측은, 김씨가 이번 선거에서는 이웃 선거구의 한나라당쪽 후보에게 비슷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전북 지역의 한 의원도 15대 때 여권 실력자의 친척이라는 사람에게 시달렸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출마하는 한 정치 신인은 표를 몰아주는 대가로 천만원을 요구하는 선거 브로커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그는 소문을 부인하고 있다.

이처럼 내·외부에서 선거 브로커가 판 치는 이유는 선거판에 돈이 몰리기 때문이다. 현행 개정 선거법은 ‘돈은 묶고 입은 푼다’는 취지로 선거운동 방법을 엄격히 제한했다. 15대까지 가능했던 명함 돌리기도 금지되었고, 플래카드를 걸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선거운동 방법이 다양하게 개발되지 않은 현실에서 이런 선거운동 제한이 오히려 편법과 음성적인 돈 거래를 조장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 일선 선거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후보들이 노골적으로 선거 브로커를 영입하는 경우도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선거구 별로 지역마다 10명 안팎의 거물급 선거 브로커가 있는데, 지금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일부 입후보자가 거물급 브로커들을 3천만원 정도의 스카우트 자금을 주고 모셔가는 경우도 있다”라고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상을 소개하기도 했다. 일부 후보들까지 합세해서 선거 브로커가 기승을 부리는 현실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손학규 의원은, 선거 브로커가 설 자리를 없애기 위해서도 성숙한 시민 의식이 필요하다고 전제하면서, 출마자들도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막가파식 선거운동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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