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의 ''막말정치'' 노림수는 3김 시대 복귀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9.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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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 판단 ‘장고’ 끝에 회심의 승부수… ‘DJ와의 대결 구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침내 ‘끝’까지 가고 말았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을 독재자로, 현정권을 독재 정권이라고 규정했다. 최상급 막말이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발언 수위도 훌쩍 뛰어넘었고, 숙명의 라이벌 DJ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버렸다. 스스로 독재 정권과 싸워서 민주주의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듯이, YS는 지금 자신을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 투사’로 설정하고 있다.

퇴임 후 첫 고향 방문. 애초에 상도동측이 ‘고향에 성묘 가는 것’이라며 정치적인 확대 해석을 경계했기에, YS가 이처럼 해석의 여지조차 허용하지 않는 직설적인 극언을 쏟아부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YS는 측근들과 상의 없이 불쑥 독설을 꺼냈다.

YS는 마치 지난 2월9일 측근들의 만류로 무산된 기자회견을 고향에서 시도한 듯한 인상이었다. 가슴에 담아둔 응어리를 한꺼번에 쏟아냈다.‘김대중씨는 독재자다. 독재자는 불행해진다.’ ‘경상도 사람들이 주요 직책에서 다 쫓겨나고 호남이 다 차지했다. 현정부가 못된 짓만 골라 하고 있다.’ ‘김대중씨는 준비된 대통령이 아니라 보복하는 대통령이다.’‘두 차례 재·보선은 금권, 관권, 폭력, 모든 부정을 동원한 더러운 선거다.’ ‘현정권에서 고문이 자행되고 전화가 도청되고 있다.’ ‘한·일 어업협정은 매국적 행위다.’

좌표 설정 끝낸 ‘준비된 반격’

고향 방문에서 현정권에 대한 YS의 극언이 이처럼 ‘봇물 터지듯’ 쏟아졌지만, 그가 감정을 이기지 못해 앞뒤 생각 없이 독설을 퍼부은 것은 아니다. 이는 귀향 첫날인 4월6일 만찬에서 DJ를 독재자라고 규정하면서, YS가 품 속에서 메모지를 꺼내 읽은 데서도 잘 드러난다. 미리 준비한 ‘원고’가 있었고, 따라서 발언의 파장까지 고려한 정치적 ‘계산’도 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YS는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YS의 행보에 대한 일반 여론도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내는 쪽으로 형성되고 있다. ‘독재자’ 발언이 알려진 뒤 몇몇 언론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70~80%가 YS의 ‘독재자 및 지역 감정 자극’ 발언이 적절치 못했다고 응답했다. 정치권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반응이 주류다. 심지어 민주계 일각에서조차 YS의 무모함을 비난하기도 한다. YS의 수하인 부산·경남 민주계 의원 상당수도 ‘어른의 감정이야 이해가 되지만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이었다’는 반응이다.

기자회견 파동 이후 김광일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원종 전 정무수석·문종수 전 민정수석 등 상도동을 드나드는 측근들도, YS에게 일관되게 정치적 행보를 자제하라고 주문해 왔다. 그들이 YS를 설득했던 논리는,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이 경쟁 관계로 비치면 국가가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YS는 참모들의 이러한 조언을 전혀 듣지 않는 것 같다. YS가 고향을 방문하기 직전 김광일 전 실장은 사석에서 “우리도 그 분의 생각을 다 알지 못한다. 요즘 그 분이 내놓는 일련의 정치적 발언들은 전적으로 스스로 판단해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YS가 밟고 있는 정치 행보의 순서들이, 다름 아닌 YS 특유의 ‘감(感)’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는 얘기이다. 물론 이러한 감은 현재의 여야 관계 및 정치 지형, 그리고 내년 총선 이후 정치권 지형 변화까지를 고려한 YS 나름의‘정세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와 관련해서 현재 여권에 몸 담고 있는 구 민주계의 한 관계자는 “YS의 행보는 두가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그가 자신의 마지막 정치 행로에 대한 ‘좌표’를 세웠다는 점이고, 둘째는 DJ와의 관계도 새롭게 설정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YS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즉 YS는 얼핏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저돌적이지만, 절대로 좌표 설정 없이 돌진하는 스타일이 아니므로, 기본적으로 DJ 정권의 불안한 미래를 감 잡았으며, 그래서 더욱‘DJ 대 YS’ 대결 국면 조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독재자 발언 파문 뒤 상도동 핵심들로부터 YS의‘영남 정권 재창출론’도 튀어 나왔다. 고향 방문 직전 YS가 측근들에게 ‘차기 정권은 영남이 되찾아와야 하며, 내가 부산에서 후계자를 키우겠다’는 뜻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요컨대 YS가 자신의 좌표를 정권 재탈환 및 후계 구도 창출에 두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와 관련해 민주계의 한 중진 의원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 아닌가. YS는 자신이 DJ의 집권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생각했으며 지난해 중반부터 부쩍 후회스럽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렇다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대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여론이 어떠한 비판을 하더라도 YS는 지금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정권에 대해 자신감 찾았다”

사실 YS의 이러한 목표 설정과 각오는 그동안의 발언을 통해 간간이 확인되었다. 다음은 그동안 YS가 공개적으로‘개인적인 각오 수준’을 내비친 대목들. “공명 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도덕적 용기이다.”(새해 첫날 상도동에서 자신의 새로운 좌우명인 ‘호연지기’의 뜻을 설명하면서). “요즘 나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산다.”(1월14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상도동 방문 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그런데 내리막을 전혀 준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정태수 1백50억원 대선 자금 폭로 뒤, 북한산 산행에서). 측근들에 따르면, YS는 지난해 말을 기점으로 뭔가 개인적 결단을 내린 듯한 언행과 행보를 보여왔다고 한다.

YS가 이처럼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통상적인 발언 수위를 넘어 마치 야당 총재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정권에 대해 ‘자신감’을 회복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즉 현재의 여야 구도에서 자신에게 정치적인 공간이 생겼다고 인식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YS와 수시로 깊은 대화를 나누는 민주계의 한 중진 의원은 “현정권에 대한 YS의 기본 인식은 ‘벌써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DJ의 미래를 매우 위험하게 보고 있으며, 앞으로 정국에 거대한 혼란이 찾아 오리라고 내다보고 있다. 앞으로 YS의 행보를 이해하는 유일한 기준은 ‘DJ의 유일한 적수는 바로 나’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YS의 일련의 도발적인 발언 뒤에는 집권 세력에 대한 ‘감정’도 섞여 있다. 특히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의 1백50억원 대선 자금 폭로는 DJ와 YS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지난해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현철씨 사면 복권 문제도 YS로서는 ‘열받는’ 대목이다. 김광일 전 실장은 “YS는 92년 대선 뒤에 집권 기간에는 단 한푼도 받지 않는다고 공언했고, 지금도 이를 지켰다는 데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정태수씨가 당선 축하금을 줬다고 폭로했다. YS의 사고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공격이다. 또한 현철씨 사면 복권 문제도 그렇다. 우리 쪽이 먼저 사면 복권해 달라고 조른 적이 없다. 청와대에서 먼저 사람이 찾아와 사면 복권해 주겠다고 약속하고서는 나중에 이를 번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라고 말했다.

YS가 현정권을 고문 정권이라고 규정하는 배경도 따로 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총풍 3인의 고문 논란 때문이 아니라, 홍인길 전 수석이 경성 비리 사건으로 재구속되면서 검찰에 인간적으로 수모를 당했다는 것 때문이다. ‘감정+정치적 계산’ 따른 밀어붙이기 작전

현정권에 대한 YS의 결기 이면에는 이처럼 DJ에 대한 인간적 배신감과 분노의 감정이 섞여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치적인 계산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3김 정치를 관통하는 첫 번째 행동 원칙은, 3김이 철저히 ‘민심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3김으로 하여금 정치 생명을 지탱케 한 힘이다.

그러나 3김은 또한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고비에서는 민심을 완벽히 역행하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끝내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갈라선 것 △91년 YS와 JP가 전격적으로 3당 합당을 감행한 것 △95년 DJ가 여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계 복귀 및 국민회의 창당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즉 여론의 비판이 아무리 거세도, 자신의 ‘정치 생명’이 걸린 문제에서만큼은 여론과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장의 여론을 거스르면서까지 새로운 상황과 여론을 적극 만들어냈다.

아마도 YS는 지금이 그러한 때라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YS가 고향에 내려가서 망국적인 지역 감정을 자극하고, 반DJ 정서에 편승해 현정권을 독재 정권이라며 ‘치고 나가는’ 것도, 바로 이러한 3김 정치 특유의 생존법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음미해 볼 대목은, 3김 정치가 여론을 거스르는 이유이다. 요컨대 자신의 정치 생명이 걸려 있을 때 여론의 물살을 거꾸로 타고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여론을 거슬러올라가는 지금이 바로, YS가 ‘정치 생명’을 건 때라는 분석이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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