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김정일, 노벨 평화상 함께 탈까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0.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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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개최로 평화상 공동 수상 가능성 높아져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리에 개최됨으로써 올 한 해 세계 평화의 화두는 단연 한반도로 떠올랐다. 6월 13, 14일 역사적인 정상회담 순간과 합의 내용은 이 기간에 구름처럼 서울로 모여든 외신 기자 수백 명을 통해 지구촌 곳곳으로 생중계되었다. 단군 이래 한반도의 정치 지도자가 한순간에 이처럼 극적으로 세계의 눈과 귀를 끌어모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까지 이루어진다면 지구촌의 이목은 당분간 한반도를 떠날 수 없는 상태이다. 무대는 한반도이지만 관객은 전세계인이 되는 이번 세계사적 대사건에서 무대 중앙에 선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영원히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던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 작업이 눈앞의 현실로 드러난 상황을 지켜본 지구촌 사람들은 두 주인공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돌발 변수가 없는 한 두 사람은 올 한 해 국제 평화의 상징적 인물들로 평가받을 것이 분명하다. 올 들어 아직까지 남북 정상회담을 능가할 만한 세계적 평화 이벤트가 없고, 몇 달 안에 그럴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북한의 태도가 급변하는 등 이변이 없는 한 두 사람이 올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가장 유력하다는 진단도 그래서 나온다.

노벨 평화상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한 차례 돌아가리라는 점은 국제 정치학계에서 오래 전부터 거론되어 왔다. 때문에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는 대북 화해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벨 평화상을 의식해 공식 비공식 노력을 다양하게 벌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끝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 학계에서는 한반도 문제를 미국이 해결할 것이고, 그 결과 미국인이 평화상을 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이와 관련해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빌 클린턴 대통령이 가능성 높은 인물로 꼽혔다. 실제 두 사람은 최근 몇 년간 한반도 문제 해결 노력이 기재된 추천서와 함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올랐고, 오는 10월13일 발표될 2000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도 어김없이 이름이 올라 있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올해 열네 번째로 후보에 추천되었고, 김정일 위원장도 후보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다.

중재자 없이 주도적으로 한반도 문제 풀어

김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올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는 이유는 단순히 정상회담을 치렀다는 데만 있지 않다. 두 정상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골칫거리로 인식되던 한반도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1994년 여름 극적으로 합의된 남북 정상회담이 불발로 끝나기는 했지만,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는 회담을 중재해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실질적 주인공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이번 정상회담은 순전히 남북한 두 정상이 주도적으로 이루어낸 합작품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대통령은 자신이 그동안 일관되게 추진해온 대북 햇볕 정책에 대한 국내외 보수파들의 우려를 어느 정도 씻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결실이 있기 전까지 국내외 보수 세력 일각에서는 대북 햇볕 정책이 별 효과도 없이 북한의 협상력만 높여준 채 한반도 문제 해결을 지지부진하게 만들 것이라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대북 강공책보다는 햇볕 정책이 더 효과가 있음을 입증해냈다.

물론 북한이 단순히 햇볕정책 때문에 정상회담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 문제 전문가들은 김정일 위원장이 그간의 폐쇄 노선을 수정한 가장 큰 이유로 북한 내에서 정권 승계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꼽는다. 정상회담을 수용해도 북한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올 가을에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도 북한으로 하여금 정상회담에 적극 나서게 한 배경으로 꼽힌다. 미국 대선에서 대북 강경론을 고수하는 공화당이 집권할 경우 북한으로서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우려를 품고, 그 이전에 서둘러 남한 및 서방에 대한 관계의 틀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남북 교류 규모가 해마다 확대되면서 더 이상 민간 차원의 교류만을 고수하다가는 북한 경제에 점점 부담이 된다는 실리적인 이유도 컸으리라는 분석이다. 이같은 배경에서 남북한 두 정상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의기 투합해 정상회담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올해 한반도 긴장 완화의 물꼬를 튼 두 주인공은 노벨 평화상 후보군으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효과도 얻은 셈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수상 자격 논란이 변수

물론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통령의 노벨상 파트너로 거론되는 데 대한 국내외 보수 세력 일각의 거부감도 없지 않다. 한국전쟁의 책임과 북한 인권 문제, 아직도 국제 테러국 명단에 끼어 있는 북한 현실을 들어 북쪽의 정상이 노벨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내 학계에서는 노벨의 평화 정신에 비추어 연좌제처럼 후보를 제약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한국전쟁의 책임을 따진다면 사망한 김일성 주석이 장본인이지 당시 소년이던 김정일 위원장은 직접 상관이 없는 사안이라는 지적이다. 또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제 사회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지도자가 노벨 평화상를 공동 수상한 전례가 있었음을 들어 남북 정상이 공동 수상하게 된다면 한반도 평화에 더 공헌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중동 분쟁을 해결한 공로로, 그 전에 테러 주범 취급을 받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지도자 아라파트가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공동 수상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남북한 두 정상이 공동 후보에 오를 경우 노벨위원회가 김정일 위원장을 국제 사회에 책임 있는 일원으로 끌어내 시상 후에도 세계 평화에 기여하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수상 자격을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물론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김정일 위원장의 노벨상 후보 자격에 대한 논란은 커질 수도 있다. 미국은 북한을 지금까지 테러국 명단에서 제외하지 않은 채 경제 제재 조처도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김정일 위원장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주는 방식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미국 정부 안에서 불만이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북한을 길들이기 위해 세계의 ‘깡패 국가’로 규정해온 미국의 정책을 김대통령이 뒤엎고 김정일 위원장을 일약 세계의 친구로 만들어주면 앞으로 미·북한 관계에서 미국의 협상력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상회담이 임박하면서 미국 정부도 남북한 두 정상의 역량과 주도권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8일 일본에서 김대통령을 만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남북 정상이 주도하는 정상회담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모든 도움을 주겠다”라고 말했다. 미국 국무부에서는 이례적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용기, 비전의 일부를 지니고 있다는 호평도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남북 정상회담 직전에 미·북한 간에 오랜 현안들이 하나씩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제네바 회담에서 미국이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 조처 해제와 테러국 명단 제외 방침을 시사한 것이다.

이런 미국의 방향 전환은 한반도 문제에서 남북한이 주도권을 쥐고 대세를 만들어냈음을 사실상 시인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는 또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미국측의 거부감이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상당히 희석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올해 노벨 평화상에 추천된 후보는 사상 최대인 1백50여명(개인·단체)에 이른다. 개인으로는 김대중 대통령·김정일 위원장·클린턴 대통령·카터 전 미국 대통령·조지 미첼 전 미국 상원의원·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 러시아 총리·마르티 아티사리 핀란드 대통령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다. 수상자는 오는 10월13일 발표하며, 시상식은 노벨상 창시자인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 기념일인 12월10일에 열린다. 노벨위원회가 남북 정상회담을 어떻게 평가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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