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공 올가미’는 전가의 보도?
  • 문정우편집장 (mjw21@sisapress.com)
  • 승인 1997.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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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노조 지도부에 ‘빨간색 입히기’… 구태 답습 ‘문민’답지 않아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노동계의 격렬한 단체 행동에 대처하는 방식은 천편일률이었다. 그것이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정치 투쟁이든 단순히 임금 인상이나 해고자 복직을 위한 생존권 투쟁이든 상관없이 정부의 해결 방식은 언제나 똑같았다. 노조 지도부의 인신을 구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노조 지도부의 이념성을 문제 삼는 ‘극약 처방’을 쓰기도 했다. 그럴 때 반드시 동원되는 수사가 ‘최근 심상치 않은 북한의 동향’이라는 말이었다.

이번 노동계 총파업에 대한 정부의 대처 방식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수성 총리는 1월13일 오전 간부회의 석상에서 “지난번 한총련 사태에서 젊은이들의 이념적 편향을 우려했던 것처럼 노동계 지도부에 대해서도 정부는 국민과 더불어 크게 걱정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북한과 관련한 최근 안보 상황에 비추어 금년 한 해 국가 안보상 각별한 경계가 요구되는 만큼 안보상 해이나 내부적 분열 책략을 결코 방치해서는 안된다”라고 토를 달았다.

이총리가 발언한 이틀 뒤인 15일에는 6개 부처 장관이 모여 ‘이번 노동계 파업이 정치 투쟁 양상을 넘어 체제를 부정하는 이념 투쟁으로 변질하고 있다’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장관들은 이 날 ‘일부 노조 지도부의 파업 행위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부작용과 파장이 있더라도 파업 주동자 검거를 미룰 수 없다’는 결론도 내렸다.

청와대·총리·검찰 ‘합동 작전’

다음에는 검찰이 한 팔 거들고 나섰다. 최병국 대검 공안부장은 15일 기자회견을 열고 “명동성당에서는 ‘자본가 정권은 선거를 통해 몰아낼 수 없다. 그들을 노동자 계급의 손으로 타도하고 그 자리에 노동자 권력이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라는 등 북한 주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유인물이 나돌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이 최근 평양방송 등을 통해 파업 투쟁 상황을 매시간 보도하면서 노동계를 격려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행정부의 공개 비난, 선전 포고와 함께 여권 핵심부도 은밀하게 여론 만들기에 나섰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14일 “이번 파업의 성격을 알려면 지도부를 잘 봐야 한다. 파업 지도자 중에는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인 사람도 있다. 파업하는 사람은 대부분 한이 많거나 이념성이 강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류의 사람들이 파업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총리와 장관, 검찰과 경찰에 청와대까지 가세해 마치 합동 작전을 벌이듯 노조 지도부에 색깔을 입히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대한 비난은 거세다. 국민회의는 16일 ‘정부 인사들의 일련의 발언은 과거 독재 정권이 반대 세력에게 용공 혐의를 씌워 억압했던 일을 연상시킨다’는 성명을 냈다. 국민회의는 또 ‘북한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의 민주 세력에 찬물을 끼얹는 망동을 저지르고 있다’며 남북한 당국을 싸잡아 비난하기도 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의원 8명은 16일 이수성 총리를 방문해 ‘파업 현장에서 이념성 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파업 노동자 전체를 용공으로 매도해 그것을 공권력 투입 이유로 삼아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했다.

야당에서는 정부가 노동법 개정을 강행할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밀어붙였다는 점과, 최근 정부 인사들의 용공 시비 발언을 연결해 여권의 저의를 의심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대선을 앞두고 선거를 보혁 대결 구도로 가져가려는 치밀한 시나리오에 의해 이루어졌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일부러 노조를 자극해 파업을 유도하고, 야당이 노조를 돕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든 다음 야당에게 다시 한번 색깔의 올가미를 씌우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야당의 시각이 지나치게 음모론적이기는 하지만, 노동법 개정 파동이 일어나고 확산되는 과정이 여러 모로 석연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과거 권위주의 정권과 똑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문민 정부를 자처해온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노동 문제를 안보 문제로 변질시키는 이런 방식으로는 노동계와 정부, 그리고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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