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총선’은 떼어놓은 당상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4.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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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곳 당선 무효 가능성…사법부 신속처리 방침으로 연내 실시 확실
경기도에 출마한 ㄱ후보 선거사무소는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고 나서도 1주일 동안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지난 2월께 후보의 수행비서가 지역 신문·방송 기자 10여명에게 현금 10만원씩 든 봉투를 돌려 후보가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ㄱ후보는 ‘옥중 출마’를 선언했지만, 후보만 어깨띠를 두르고 명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선거법 때문에 선거사무소는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였다.

4월6일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해 실명이 공개된 후보는 35명. 금품 향응 제공, 사전 선거운동, 인쇄물 배부 등 혐의가 다양하다. 하지만 해당 후보들은 한결같이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당직자 회의를 개최하면서 참석자 1백20여명에게 약 1백20만원어치 식사를 제공한 혐의로 고발된 인천의 ㅇ후보는 “당직자들에게 외사촌형이 한턱 내겠다고 한 것이고, 총무부장이 카드로 결제해 정상으로 회계 처리를 했다”라고 말했다.

사무소 개소식을 하면서 참석자에게 1백17만원 상당의 저서를 나누어 준 경남의 ㅈ후보 측은 “베스트 셀러도 아니고 후보가 자기 나름으로 생각한 것을 정리한 책인데, 나누어주면 안된다는 것을 몰랐다”라고 말했다.

인쇄물 배부, 음식물 제공으로 두 차례나 고발된 인천의 ㅈ후보(구속)측은 ‘음모론’을 제기하며 책임을 돌리기에 급급했다. 조폭을 선거에 동원했다고 보도된 ㅈ후보측은 “두 사람이 선거운동을 했다며 룸살롱 영수증을 결제해 달라고 요구해 거절했더니 다른 당으로 갔다. 상대 후보측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해 우리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다”라고 말했다.

17대 총선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선거 사범은 16대 총선에 비해 상당히 늘었다. 선관위에 따르면 4월7일 현재 선거법 위반 적발 건수는 4천7백14건. 16대 선거와 비교하면 3배 가까이 많다. 인쇄물·홍보물 배부로 적발된 건수가 2천5백57건으로 가장 많고, 기부 행위가 8백58건에 이른다. 선관위 관계자는 “선거가 혼탁해졌다기보다는 보상금 등으로 인해 내부 고발자가 많아져 이전에 감추어졌던 부분들이 드러났고, 선거감시단 활동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금품 관련 신고 가운데 20% 가량이 선거 캠프 내부 인사들의 고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법에 따르면, 후보자가 100만원 이상 벌금형을 받거나, 선거책임자 또는 후보의 직계 존·비속이 3백만원 이상 벌금형을 받으면 당선 무효가 된다. 이전에는 선거책임자나 후보의 직계 존·비속은 징역형 이상을 받아야 당선 무효가 되었으나 개정 선거법에서 요건이 강화되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후보나 배우자, 선거책임자가 고발된 경우는 당선되더라도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선관위와 검찰에 따르면, 현재 고발되었거나 수사 중인 후보 가운데 당선이 유력한 후보가 여럿 있다. 또한 선거전이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각 당이 상대편 후보를 직접 고발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의 유력 후보인 이 아무개·김 아무개·문 아무개 후보를, 열린우리당은 경쟁 후보인 한나라당의 김 아무개 후보와 또 다른 김 아무개 후보 등을 고발한 상태다.
선거가 끝난 후에도 각 당이 고발하는 유력 후보는 늘어날 전망이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선거가 끝나면 일괄적으로 위법을 저지른 상대 후보를 고발할 방침이다”라고 밝혔다. 열린우리당도 마찬가지다. 4·15 총선 이후 당선 무효자가 속출해 ‘미니 총선’(재·보궐 선거)을 치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중앙선관위의 권한이 강화된 것도 ‘미니 총선’ 가능성을 한층 높인다. 4월9일 선관위는 현역 의원 2명을 포함해 17대 총선 후보 11명이 불법 선거 비용을 지출한 혐의를 잡고 금융거래자료제출요구권을 발동해 금융 거래 전반에 대해 실사를 벌였다. 이 가운데는 당선권에 든 후보가 5~6명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선관위가 선거 기간에 불법 선거 비용 지출 여부에 대해 실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선거 후에 후보 쪽으로부터 회계 보고를 받은 뒤에야 실사할 수 있었던 것이 선거 기간에도 실사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선거 사범을 엄정하게 처리하겠다는 의견을 밝히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동안 선거법을 위반한 후보들은 선거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켜 국희의원 임기를 연명하거나, 80만~90만원 벌금형을 받아 기사회생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후보들이 이런 관행을 기대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지난 4월2일 전국 선거사건 전담 재판부 회의에서 “일부 재판에서 당선무효형에 못 미치는 벌금 80만~90만 원을 선고하는 관행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금품 제공 행위는 금액에 상관없이 엄벌하고, 흑색선전에 대해서도 엄정하게 형을 선고하기로 했다. 또한 대법원은 신속한 사건 처리를 위해 사건 접수 후 2주 이내에 첫 재판 기일을 지정하고, 첫 재판에 대한 연기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필요하면 2~3일 간격으로 재판을 열어 단기간에 선고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장유식 변호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는 “20만원 차이로 국회의원 직이 오고간다는 것은 국민들의 법 감정과 맞지 않았다. 그리고 현행 선거법으로도 선거사범에 대한 재판은 1심이 기소 후 6개월 이내에, 2심과 3심은 각각 3개월 내에 선고하도록 되어 있다. 대법원이 통일된 기준으로 엄격하게 판단하겠다고 밝힌 것은 필요한 조처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16대 총선에서 당선 무효가 되어 다시 선거가 치러진 지역구는 10곳이었다. 각 당은 17대 총선에서 당선 무효가 될 후보가 최소 20~30명에서 많게는 50~60명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각 당 공천 탈락자 가운데 벌써부터 재·보궐 선거를 준비하는 후보들도 생겨났다. 공천에서 탈락한 한 후보는 “인물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하는 젊은 후보 가운데 재·보궐 선거에서 회생을 노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중앙당에서 ‘재·보궐 선거를 겨냥해 100여명이 눈도장을 찍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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