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동자도 웃을 정치판 ‘거짓말 시리즈’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7.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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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 관련 정치인들 ‘말 뒤집기’ 백미…외국에선 문제되면 곧바로 위기
거짓말과 기만은 공직자들의 실무 내용이 되었다.

­미국 대법원 판사 윌리엄 더글라스의 회고록 <젊은이여 동쪽으로 가라>에서.

한보 사건은 긴 거짓말 행렬을 낳고 있다. 정치인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족속이라는 비아냥을 입증이라도 하듯 검찰에 소환되기 전과 후의 말이 달랐다.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올라서 구속되었거나 소환 조사를 받은 30여 명의 정치인들은 “절대 그런 일 없다. 믿어 달라.”(홍인길 의원)“왜 내 이름이 거기에 올라 있는지 모르겠다.”(박종웅 의원) “전혀 사실 무근이다.”(김상현 의원)“절대 그런 일 없다. 모르겠다거나 기억이 안난다는 것이 아니다.”(김용환 의원)라고 딱 잡아뗐다.

그러나 이들의 결백 주장은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거짓말이 드러난 상황에서의 변명 또한 일구이언은 이부지자(一口二言 二父之者)라는 옛말을 무색케 한다. “(측근이 돈 받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김덕룡 의원)거나“오래 되어서 기억이 희미하다.”(이중재 의원)는 말은 그마나 봐줄 만하다.

김상현 의원은 소환 조사 후 “정총회장한테 돈을 받은 바 없다고 했지 한보 돈을 안 받았다고 한 적 있느냐”라고 강변했다. 정치적인 수사법의 극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정수 부산시장은 한술 더 뜬다. 검찰은 문시장을 조사한 후 지방자치 선거 전인 95년 6월 초 2억원을 받았다고 발표했는데, 문시장은 일단 이 말을 부정했다. 그의 해괴한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김종국씨가 사과 상자를 놓고 갔고 이 상자를 형과 모친이 가져갔는데, 형이 뒤늦게 검찰 조사 과정에서 ‘6천만∼7천만원이 들어 있었다’는 말을 했다더라는 것이다. 결국 문시장의 형은 동생에게 돈이 있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선거 자금으로 잘 썼다는 말이 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발뺌이다.

정치인과 거짓말은 정치 시장이 열린 이래 줄곧 거래되어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치인의 거짓말은 한보 같은 사법적 거짓말말고도 정치적 행위와 관련된 거짓말이 더 많을 것이다. 그 가운데는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정상 참작이 되기도 하고, 애교로 봐 줄 수 있는 거짓말도 있다. 물론 거짓말이라는 점에서 사면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죄질은 다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 불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공직자 부패 척결,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정계 개편 불가와 중간 평가 실시, 돈을 받지 않았다는 등의 말은 약속을 나중에 번복해 결과적으로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거나, 처음부터 고의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국내 정치, 거짓말 때문에 궁지 몰린 경우 없어

정치 9단이라는 3김씨 또한 고의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동시에 했다. 김종필 총재는 노태우씨 축재 파문 이후 YS의 대선 자금에 관해 95년 11월3일 ‘모른다’고 했다가 8일에는 ‘천문학적 대선 자금 사용을 줄곳 지켜본 산 사전’이라고 말을 바꾸었고, 9일에는 ‘YS가 쓴 대선 자금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라며 한발짝 물러났다. 김총재는 이듬해인 96년 1월 25일, 일련의 말 뒤집기 시리즈 마지막 결정판을 내놓았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통령이 썼던 대선 자금을 내가 밝히면 여러분은 아마 기가 막힐 것…”.

김대중 총재도 정계 은퇴 선언과 번복,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20억원 수수 관련 발언 등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할 수 있다. 5·18의 경우 그는 95년 11월24일 관련자를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가, 다음날 역사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수정했고, 다시 다음날 재판에 회부해 엄중 처단해야 한다고 뒤집었다.
말과 관련해 유난히 구설이 많았던 김대통령도 민자당 대표 시절 일련의 내각제 각서 파동을 겪으면서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내각제에 합의한 일이 없다’는 거짓말을 했다. 92년 대선 자금 문제나 취임 이후 정치 자금에 관한 YS의 말은 앞으로 거짓말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거짓말은 물론 한국 정치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동서 고금을 통틀어 정치인에게는 늘 거짓말쟁이라는 조롱이 붙어 다녔다. 그러나 거짓말로 인해 정치인이 부상하는 정도는 다르다. 한보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의 정치 생명이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한국에서 거짓말로 인해 정치인이 사망 선고를 받은 예는 없다시피 했다. 미국·일본·유럽연합에서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혀 정치적으로 살아 남은 정치인이 별로 없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들 나라 정치인에게‘유 아 라이어’‘아나타와 우소쓰키’라는 말은 가장 무섭고도 치욕적인 것이다.

외국에서 거짓말이 정치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힌 사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전형적인 예로 꼽히는 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은 도청 등 불법 행위보다 닉슨의 거짓말이 그의 사임을 초래했다. 줄곧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최근 동료 의원들로부터 견책과 30만달러 벌금을 내라는 ‘판결’을 받은 미국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 역시 탈세 자체보다 하원 윤리위원회에 낸 소명 자료의 허위성이 문제가 되었다.

삼류 정치라는 일본에서도 거짓말은 거물 정치인을 단숨에 몰락시켰다.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 총리는 95년 오렌지 공제조합 사건과 관련해 3천만엔을 받은 사실을 부정하다가 정치 생명의 끝을 스스로 재촉했다. 그는 처음에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다가 수수 현장에 있었다는 꼬리가 잡히자 ‘나중에 되돌려 주었다’고 변명하여 거짓말 정치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때 프랑스 엘리제궁의 차기를 넘보며 승승장구하던 베르나르 타피를 좌초시킨 것도 거짓말이었다. 그는 조작·매수·위증 등 정치인이 검은돈을 만지면서 드러낼 수 있는 온갖 추악함을 다 보였다는 평가를 들었다. 미테랑 대통령이 그를‘정치적 양아들’로 부르며 감싸고 돌았지만, 그는 결국 지난 2월 파리 상테 감옥에 갇혔다. 이미 비리가 드러나기 시작한 95년 5월 프랑스의 유력 시사 주간지 <렉스프레스>는 ‘타피는 법원의 판결과는 관계없이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에 수감된 죄수’라고 정치적인 사형 판결을 내렸다.

앞으로 거짓말 정치인의 몰락을 더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 부부는 화이트워터 스캔들과 민주당 대선 자금 스캔들 때문에 사면 초가에 몰려 있다. 특별 검사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고, 의회의 청문회가 준비되고 있으며, 언론들도 집요하게 따라붙고 있다. 이미 힐러리는 언론으로부터 ‘선천적인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정치인의 거짓말은 윤리나 도덕 범주에서는 문제가 될지언정 그것이 모두 정치 생명의 위기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외국의 예나 한보 사건에서 보듯이 검은돈이나 협잡·섹스 등 불법이거나 극히 부도덕한 추문에 연루된 사실을 덮거나 발뺌한 경우 일이 더 크게 불거진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든 일상적인 것이든, 정치인들은 왜 거짓말을 밥먹듯 할까. 정치인과 거짓말은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정치인은 타고난 거짓말쟁이인가, 정치라는 직업이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인가.
“정치 본질 자체에 원인”…마키아벨리즘도 한몫

김광웅 교수(서울대·의회정치)는 정치의 본질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을 만족시켜야 하는 행위다. 그러나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명제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런 한계를 잘 알면서도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과정에서 헛말과 거짓말이 양산된다.”

공약(公約)이 대부분 공약(空約)이 되는 것도 이런 정치의 생리와 관련이 있다. 재선을 노리는 상황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른바 ‘투표자의 합리적 무지’를 활용하는 유효한 재선 전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강물이 없는데도 다리를 놓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이라는 영국 속담은 이런 정치인의 행위를 다소 과장해 비유한 말이다.

박재창 교수(숙명여대·의회정치)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박교수는 정치라는 작업은 다양한 갈등적 이해 관계를 조정해 국민 통합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 과정 자체가 구조적으로 오해를 부를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다양한 이해 집단을 겨냥해야 하기 때문에 ‘신한국 건설’ ‘정의 사회 구현’같은 추상적이고 다의적인 약속을 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처지와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정치인의 행태를 분석하는 틀에 마키아벨리즘을 빼놓을 수 없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정치 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국가 경영 혹은 정치 행위에는 불가피하게 모든 수단이 허용되므로, 정직하거나 성실함으로써 자신의 지위가 약화될지도 모른다고 판단될 때 약속을 깨거나 위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방하다는 논지를 폈다. 그는, 역사책을 보면 성실과 정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군주는 뒤통수를 얻어맞기 일쑤였지만, 간사한 꾀를 써서 사람들을 농락할 줄 안 군주들은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군주는 짐승의 본성을 지녀야 한다며, 필요에 따라 여우와 사자의 본성 사이를 오락가락해야 한다고도 했다.

마키아벨리즘은 뒷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악인들을 정당화했다는 이유로 매도되었지만, 국가를 경영하는 현실에서는 20세기까지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정치학자들은 정치인의 거짓말을 모두 매도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불순한 동기에서 의도된 이른바 새빨간 거짓말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정치 상황에 맞춰 처신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말이 달라진 경우가 많고, 외교 분야 등에서는 거짓말이 오히려 정당한, 이른바 흰 거짓말도 다수 존재한다는 것이다.

제정구 의원은 정치인과 거짓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정치인의 거짓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공익을 위한 것이냐,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냐이다. 관료보다 공적 성향이 강해야 할 정치인이 사리사욕에서 말미암은 거짓말을 한다면 이것은 응징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공적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구사하는 정치인은 훌륭한 정치인이다.”

국민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한보 시리즈’를 결코 공적 거짓말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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