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대선 후보, 서석재 손안에 있다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6.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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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본·불교계 조직력 바탕으로 킹 메이커 발돋움…견제성 괴소문에 시달리기도
 
서석재 의원실에 비상이 걸렸다. 8월 말부터 서의원을 둘러싸고 이상한 소문이 정가에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서의원이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해 김광일 비서실장, 이원종 정무수석, 김덕룡 정무장관 등 여권 핵심 인사들을 사석에서 매우 강도 높게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 소문에는 꽤 그럴듯한 배경 설명까지 덧붙어 있다. 즉 서의원은 최형우 의원과 함께 민주계의 좌장 격이지만,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잇따른 설화 및 필화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불운을 겪은 뒤 쌓인 불만을 터뜨린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사실 민주계 인사 치고 서의원만큼 억세게 운이 없는 정치인도 드물다. 13대 때 동해시 재선거 후보 매수 사건으로 치명상을 입고 민자당을 떠났던 그는, 동료들이 쾌속 성장을 거듭하던 민주계 집권 초기를 말 그대로 낭인으로 보냈다. 94년 총무처장관을 맡으면서 재기에 성공하는가 싶더니, 95년 8월 전임 대통령 2천억 비자금 발언 파문으로 다시 무관이 되었다. 지난 5월 당정 개편 때도 비서진이 대신 서면으로 작성한 한 인터뷰에서 ‘전두환·노태우 사면 가능성’을 거론하는 바람에 요직에서 멀어졌다. 정치권에서 언론과 악연을 맺은 정치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번 건도 따지고 보면 설화나 마찬가지이다. 서의원측은 “다른 일도 아니고 설화 때문에 당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했겠는가. 누군가 악의적이고 조직적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라고 항변한다. 소문이 퍼진 시기는 비슷한데 출몰하는 지점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경찰 등 정보기관에서 그런 얘기가 들리는가 하면, 당 안팎에서도 순식간에 퍼졌다. 벌써 소문의 내용은 강삼재 사무총장실과 청와대 비서실에도 보고되었다. 잇단 시련을 딛고, 이제는 킹 메이커로 서서히 기지개를 켜려는 서의원으로서는 다급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소문의 확산에 대응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서투르게 해명했다가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서의원측 고민이다. 그렇다고 딱히 짚이는 구석도 없다. 서의원의 한 핵심 측근은 “누가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방정식을 풀 수 없다”라고 말한다. 다만 소문을 퍼뜨린 측이 치밀하게 계산된 각본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현재 정치권의 최대 이슈인 내년 대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하게 짐작하는 정도이다.

대권 주자 아니어서 역설적으로 힘 가져

 
지난 8월19일 독불장군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김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대권 금언령을 내린 이후, 분위기가 가라앉은 여권에서 서의원에 관한 이러한 이상한 소문은 사실 여부를 떠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즉 누가, 무슨 목적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다. 상상력과 추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소문이 겨냥하는 표적이 ‘왜 하필이면 서석재 의원이냐’ 하는 점에 이르러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지는 대목이 있다. 즉 현재 시계 제로 상태인 신한국당 차기 대권 경쟁 구도에서, 서의원의 행보야말로 대권의 향방을 점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여권에서는 서의원을 가리켜 흔히 ‘대권 행방의 바로미터’라고 부른다. 현재 김대통령 심중을 정치권에 전달하는 통로는 이원종 정무수석과 강삼재 사무총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국이 대권 국면으로 접어들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권 고지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서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아홉 마리 용’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두 사람의 힘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두 사람은 아홉 주자에게 밀린다.
그러나 서석재 의원은 다르다. 서의원과 함께 민주계 실세 3인방으로 통하는 최형우 의원과 김덕룡 장관은 이미 대권 주자 반열에 올라서 있다. 상도동 사단에서 조직의 귀재로 통하는 서의원은 92년 대선에서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나사본) 본부장을 맡아 YS 당선에 일등 공신이 되었다. 김윤환·이한동 고문 등 민정계 중진들과도 두루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불운만 겹치지 않았어도 그 자신이 대권 주자로 거론되었을지도 모른다. 동해시 재선거 매수 사건 때 YS를 대신해 정치적 부담을 떠안았기 때문에, 서의원에 대한 김대통령의 신임은 지금도 각별하다고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차기 대권 주자들에게 서의원은 유일하게 ‘말발이 서는’ 민주계 실세인 것이다. 여기에는 서의원 자신이 대권 주자가 아니기 때문에 갖는 역설적인 힘도 작용하고 있다고 보인다. 어쩌면 괴소문을 퍼뜨린 쪽이 진짜로 노리는 것은, 여권 핵심부 안에서 서의원이 갖는 독특한 정치 파워를 다각도로 체크해 보려는 고단수 정치 공작일 가능성도 매우 높다. 즉 YS의 신뢰에 변함이 없는지, 민주계 내부의 결속력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이처럼 민감한 소문에 서의원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등이다.

실제로 소문이 퍼져나간 뒤 몇몇 사람은 서의원 측에 전화로 진위 여부를 물어오기도 했다. 물론 서의원측은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대꾸했다. 그러나 현재 서의원측은 “일일이 해명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고, 그 소문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줄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서의원을 지켜보는 대권 주자들의 시각이 그만큼 예민해져 있고, 거꾸로 서의원측도 자신을 둘러싼 여권 내부의 복잡한 이해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즉 내년 대선에서 ‘서석재의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으리만큼 크다는 점을 누구보다 서의원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잖아도 서의원은 극도로 몸조심을 하던 예전의 태도와 달리,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여권의 대권 경쟁 구도에서 킹 메이커로서 입지를 세워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YS가 ‘독불장군 발언’으로 대권 주자들의 경쟁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 전만 해도, 그는 조심스럽게 ‘대권 후보 사전조정론’을 피력했었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대권 후보를 사전에 조정하는 과정에서 서의원이 모종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서의원 마음 먹으면 나사본은 언제든지 복원”

그러나 서의원의 파괴력은, 민주계의 좌장이면서도 스스로 대권 주자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거중 조정자로서의 파워만은 아니다. 차기 대권 주자들이 서의원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지켜보는 이유나, 서의원 스스로 스스럼없이 킹 메이커 역할에 대해 운을 뗄 수 있는 배경에는, 바로 상도동의 조직 책임자로서 닦아온 엄청난 조직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서의원은 지난 8월31일부터 9월1일까지 경기도 김포에서 나사본 간부급 인사들을 대상으로 수련회를 갖기로 했었는데, 행사를 며칠 앞두고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한 시기라는 이유로 무기한 연기했다. 나사본은 92년 대선 직후 김영삼 당선자의 지시에 따라 공식으로 해산식을 치른 이후 정치권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서의원측의 설명에 따르면, 서의원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은밀하게 조직이 유지되어 왔다. 이번에 대규모 수련회를 계획한 까닭도 내년 대선을 앞두고 조직을 점검해야 한다는 내부 여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92년 대선에서 민주산악회(회원 2백만명)와 함께 YS 사조직의 두 축이었던 나사본(회원 2백30만명)말고, 서의원이 개인적으로 관리해온 불교 인맥도 무시 못할 정치 재산이다. 서의원은 오는 9월13일 서울 조계사에서 국회 불자 모임인 정각회 회장 취임 법회를 갖는다. 그는 동해시 재선거 매수 사건 이후 권익현 의원이 맡았던 정각회 회장 자리에 지난 5월 복귀했다. 서의원이 다시 정각회를 맡은 것은 불교계 내부의 강력한 요청과 정각회 소속 의원들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의원이 킹 메이커 역할에 시동을 걸고 있다고 해서, 이를 YS의 의중을 벗어난 독자적인 세 만들기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한국당의 어떤 대권 주자도 서의원만큼 전국적인 규모의 강력한 사조직을 구축한 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금 모든 대권 주자가 그를 끌어들이려고 군침을 흘리고 있다는 점에서, 서의원의 주가는 높아만 가고 있다. 여기에다가 김대통령이 그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서의원의 행보는 그야말로 대권 행방의 추이를 가리키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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