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 기자들 "권력이 새기 시작했다"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6.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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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기자들, PK 중용·차기 주자 행보·국회 공전 등 ‘증거’ 제시
 
대권 금언령이 내려진 신한국당에서 요즘 가장 활발하게 본심을 토해내고 있는 박찬종 전 의원이 지난 6월 일본을 방문하기 직전의 일이다. 그는 자신의 일본 방문 기간에 하시모토 총리와 면담이 가능한지를 주한 일본대사관에 은밀하게 타진했다. 물론 국제 무대에서 위상을 한껏 끌어올리려던 그의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신한국당 대권 예비 후보들 간의 복잡한 파워 게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간파하고 있는 일본측이, 박씨의 국내 정치용 그림 만들기에 국가 원수를 조연으로 등장시킬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자칫하면 김영삼 대통령이나 여권내 다른 세력으로부터 오해를 살 여지도 다분했다.

그러나 만약 박씨가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상태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과정에 대해 소상히 아는 한 소식통은 “가뜩이나 일본에 대한 한국 정치인들의 인식이 좋지 않은데, 일본 정부가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를 푸대접할 이유는 없다. 다만 지금은 한국의 차기 권력의 향배를 예의 주시하는 단계이다. 어떤 인물이 집권하느냐 하는 점은 일본으로서도 대단히 중대한 사안이다”라고 말한다.

미국대사관, 차기 주자들과 은밀히 접촉

권력이 새는 조짐은 반드시 국내 권력 집단 내부나 그 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관료 사회·언론계·재계의 ‘이탈’을 통해서만 검증되는 것은 아니다. 주요 국가 대사관 간부들과 여야 차기 주자들이 접촉하는 빈도가 잦아지고, 국내 외신 기자들이 국제 정치가 아닌 차기 대권 문제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면,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권력 누수의 징표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주요 국가 대사관의 한국 정치 담당 직원이나 세계 유력 언론의 서울 특파원들은 한국 정부의 레임 덕 현상과 차기 대권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를 극도로 꺼린다. 사안의 성격상 까딱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다분한 데다가, 한국민들로부터 내정 간섭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대다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로 일관한다.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다.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는 외국 언론인들까지 입단속에 신경을 쓰는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김대통령이 청와대 불상 철거를 지시했다’고 사실과 다른 소문을 확인 절차 없이 기사화한 <오스트레일리언 파이낸셜 리뷰 designtimesp=2915> 브루스 치스먼 기자에 대해, 올해 초 한국 정부가 입국 비자를 내주지 않은 사건이 그것이다. 서울 주재 외신 기자들이 한국 정치에 대해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직무를 소홀히 하거나 차기 대권에 대한 기사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권력 이동’의 흐름을 감지하려는 이들의 왕성한 활동은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요즘 미국대사관측이 차기 대권 주자들을 극비리에 개별 접촉하고 있다. 대사관측은 차기 주자들의 대미관·대북관, 특히 통일관을 관심있게 관찰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권력의 동향을 취재하려는 외신 기자들이 청와대 관계자 면담을 요청하는 건수도 늘고 있다” 라고 말한다.

지금 정가에서는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가 여야 정치 지도자들과 연쇄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물론 이러한 소문은 온통 ‘YS 이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정치권으로서는 결코 간단히 보아넘길 사안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 일부에서는 이러한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신한국당의 한 유력한 대권 후보 진영에서는 “한 달에 최소한 한두 번 정도는 만나자는 연락이 온다. 대사나 부대사 같은 지도급 인사와 만남이 이루어진다. 저쪽에서도 권력의 향배에 대해 준비한다는 차원에서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라고 말한다.

최근 미국 정부는 국무부 한국과와 미국대사관 진용을 개편하면서 지한파 인사를 대거 중용해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국무부 한국과는 중국과나 일본과보다 인원이 3~4명 많아졌다. 북한 핵 문제 이후 한반도의 국제적 비중이 커졌기 때문이다(<시사저널> 347호 참조). 서울 주재 외신 기자들이 한국의 권력 이동에 관심을 쏟는 까닭도 사실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김영삼 정부의 권력 누수 현상이나 차기 대권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국 한국의 대북 정책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권부 눈치 보던 언론 ‘YS 비판’ 강도 높여

외신 기자 사회에서 ‘한국통’으로 알려진 몇몇 구미계 특파원이나 일본 특파원들은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으로 볼 때 이미 레임 덕이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들은 그 증거로서 개원 국회 공전과 최근 잇단 PK 인사 중용, 그리고 여권 대권 주자들의 활발한 행보 등을 제시한다.

김영삼 정부의 레임 덕 현상에 대해 기사를 쓸 예정이라는 한 구미계 특파원은 “권력자가 자신의 측근 인사들만 기용하는 것은 전형적인 권력 말기 현상이다. 우리는 개혁에 실패한 남미 국가들과 대비해서 김대통령의 개혁 일변도의 운명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라고 말한다.

반면 일본 특파원들은 한·일 관계 또는 북·일 관계의 시각에서 권력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서울에서 10여년 활동해온 한 일본 특파원은 “외교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는 김영삼 정부의 스타일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월드컵 공동 개최를 계기로 한·일 관계가 정상화됐지만, 한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뒤바뀔 가능성은 남아 있다. 김대통령이 권력 누수를 막기 위해 외교 문제를 카드로 활용한다면 현재의 한·일 관계는 다시 경색될 수도 있다고 본다. 과연 차기 대통령이 현재의 한·일 관계를 2002년 월드컵 때까지 유지할지 여부도 불안하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집권 초기만 해도 권부의 입장에 충실했던 일부 언론이 최근에는 국립중앙박물관 보전 캠페인을 벌이면서 정부의 즉흥적인 결정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현상도 권력 누수의 한 징후라고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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