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의 한보 청문회 전략
  • 李叔伊 기자 ()
  • 승인 1997.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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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한보 청문회/국민회의는 팀플레이…자민련은 각개 약진
김현철씨의 2천억원 리베이트 수수설이 터져나오면서 한보 국정조사특위에 임하는 야당의 공세가 한층 세졌다. 2천억원 수수가 사실이라면 그 용처가 밝혀져야 하고, 용처를 밝히려면 한보특위를 정권의 총체적 비리를 규명하는 특위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야당은 한보특위의 증인으로 대통령까지 불러야 한다는 등 현 정권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하지만 큰 목소리와 달리 청문회 전략은 철저히 ‘실사구시’형으로 짜고 있다. 지나치게 개인기에 의존해 스타는 탄생했지만 실속을 별로 차리지 못했던 5공 청문회나 광주 청문회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위가 가동되기 하루 전인 지난 3월20일.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박상천 총무를 급히 호출했다. 특위 의원들에게 자신의 의중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김총재의 주문은 ‘청문회에서 지나치게 민감한 표현은 삼갈 것. 특히 현철씨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 것’이었다. 이 주문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지나친 공세가 역으로 현철씨에 대한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자식 가진 아버지로서 동병상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스타 의식에 젖은 의원들의 돌출 발언을 미리 막으려는 노련한 지휘관의 상황 판단이 깔려 있다는 관측이다.

현철씨 다닌 룸살롱·대학 등 훑고 다니기도

이에 따라 국민회의는 철저한 팀플레이 작전을 짰다. 당초 위원 5명을 한보철강 인허가, 김현철씨 국정 개입 의혹 등 쟁점 별로 배치하려고 했다가 다시 증인 별로 나눈 것이 좋은 예다. 증인 별로 주공격수와 보조 공격수를 나누어, 주공격수에게 각자가 수집한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고 시간도 많이 주기로 원칙을 세웠다. 김현철·홍인길 씨는 김경재 의원, 정태수·박경식 씨는 조순형 의원, 김기섭씨는 이상수 의원, 박태중씨는 김민석 의원이 주공격수다. 은행과 정부 부처도 같은 방법으로 나누었다.

공격은 물론이고 수비에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여당 의원들이 권노갑 의원을 물고늘어져 DJ의 정치 자금 문제까지 연계할 것에 대비해 방어작전을 짜고 있는 것. 구체안이 나오면 미리 권의원과 입을 맞출 작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팀플레이에 역점을 둔다고 해도 의원들 사이의 미묘한 경쟁 의식까지는 막을 도리가 없다. 이번 텔레비전 청문회가 당 차원으로 보면 대선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중요한 분수령이 되지만, 개인으로는 정치적 도약을 위한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의원들은 발언 시간이나 발언 순서를 놓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관심이 덜한 증인들은 주공격수에게 더 많은 시간을 배정하면서도 핵심 증인인 김현철·정태수 씨에 대해서는 의원 5명이 공평하게 질문 시간을 나눈 것이 그런 연유에서다.

율사 출신과 비율사 출신 사이의 신경전도 만만치 않다. 율사 출신인 이상수 의원은 상대적으로 느긋하다. 증인 심문은 법정에서 늘 하던 일이라 부담이 덜하다는 얘기다. 비율사 출신들 역시 나름의 장점을 내세우며 전혀 밀릴 것이 없다는 반응이다. 조순형·김경재 의원은 상임위에서 갈고 닦은 송곳 질문의 위력을 더 큰 무대에서 선보이겠다며 벼르고 있고, 김원길 의원은 경제통의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겠다고 큰소리친다. 김민석 의원은 학생운동 시절 공안 검사와 늘 법리 싸움을 벌이던 실력만으로도 증인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고 자신한다.

국민들에게 전달되는 통로가 텔레비전인 만큼 방송 메커니즘을 의식한 준비도 만만찮다. 이 부분에 대해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의원은 김민석 의원. 김의원은 “뭘 터뜨리느냐도 중요하지만 청문회에서 오가는 말들이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면서 효과적인 텔레비전 이용에 고심하고 있다. 모든 방송에 사전 대본이 있는 것처럼 텔레비전 청문회도 낱말 하나 토씨 하나까지 신중하게 골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의원들이 가장 공들이는 대목은 메가톤급 정보를 터뜨리는 것이다. 의원들은 새로운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김현철씨가 다녔다는 룸살롱을 직접 찾아가보기도 하고, 김씨가 다닌 한성대·고려대 등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어떤 의원은 김씨의 박사 논문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사소한 것부터 다시 훑다 보면 의외의 사실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원길 의원은 김대통령의 92년 대선 자금을 집중 추궁할 작정이고, 김경재 의원은 현철씨의 숨은 정치 자금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증거 확보에 나섰다.

심리적 부담도 상당

팀플레이를 표방하는 국민회의와 달리 자민련은 의원 각자의 개인기에 맡기고 있다. 경제통 이상만 의원이 금융 쪽을, 관료 출신 이양희 의원이 정치 분야 질문을 주로 맡고, 간사 이인구 의원이 빈틈을 메운다는 전략이다. 냄새 맡는 데 귀신이라서 별명이 개코인 이인구 의원은 한보 비리의 실체를 밝힐 비장의 무기가 있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전국민의 시선이 집중되는 만큼 특위 의원들이 느끼는 심리적 부담도 크다. 자칫 실수라도 하거나 기대에 못미친다면 그만큼 점수가 깎일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국민회의 이상수 의원은 “자다가도 문득문득 깬다”라고 털어놓는다. 특위 의원들 사이에서 ‘스타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청문회 스타 치고 잘된 사람 없지 않은가’라는 말이 흘러나오는 것도 그들이 느끼는 부담감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준다.

같은 여의도에서 제작되지만 여느 방송국 프로그램보다 시청률이 높을 것으로 보이는 한보 청문회. 전원 신인 연기자가 캐스팅된 문민 정부의 이 특집 드라마에서 일약 주연급으로 발돋움할 주인공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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