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대선 자금'' 승부수 던지다
  • 文正宇 기자 ()
  • 승인 1997.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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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대선 자금 불공개 수용’ 초강수 승부…민주계 호감 얻은 대신 정치적 부담 커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가 경선 가도를 쾌속 질주하고 있다. 이대표는 파란이 예상되던 5월21일 당무회의에서 경쟁자들의 집단 저항을 가볍게 제압하고 당헌·당규 개정안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당헌·당규 개정안을 무리 없이 통과시키는 데는 민주계 모임인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의 지지 혹은 묵인이 큰 힘이 되었다. 5월23일 이대표는 대선 자금 공개 불가 방침을 밝힌 김영삼 대통령의 손을 선뜻 들어주어 민주계의 성원에 보답했다. 김대통령과 민주계 그리고 이대표 사이에는 전에 없던 동지 의식마저 감돈다.

하지만 이대표는 김대통령의 방패 역을 자임해 민주계의 호감을 산 만큼 정치적 부담도 떠안게 되었다. 이대표가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 공개 불가 원칙을 수용한 것은, 그가 지난 5월1일 <중앙일보>와 문화방송이 공동 주최한 시민대토론회에서 밝혔던 입장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당시 그는 ‘여야 모두 92년 대선 자금 내역을 고백해야 한다’고 강도 높게 주장했었다. 따라서 그는 당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그가 평소 주장하던 ‘아름다운 원칙’(최근 이대표가 펴낸 자전적 에세이집 제목)을 뒤집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당장 야당은 김대통령과 이대표를 싸잡아 거칠게 비난하는 판이다.

대선 자금에 대한 그의 입장 선회가 과연 당내 경선에 얼마나 보탬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는 지난 3월13일 당 대표에 지명된 이후 두 달여를 화합과 조정과 타협보다는 철저히 당권 강화를 위한 투쟁 쪽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대표에 취임하자마자 ‘해당 행위’라는 거친 표현까지 써가며 그의 당 대표 취임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하는 주자들을 견제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다

그 뒤에 그는 민주계의 정발협 결성 움직임에 대해 분파 행동을 좌시하지 않겠다며 두 번이나 공개 경고했다. 그는 청와대 주례 회동 때마다 김대통령에게 당내 분파 행동을 견제해 달라고 요청해 관철했다. 그런 그의 움직임에 대해 민주계는 어려운 일만 있으면 김대통령에게 찾아가 매달린다며‘팥쥐 정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팥쥐라는 말 속에는 그에 대한 민주계의 ㅌ??녹아들어 있다. 세가 불리해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기는 하지만 때가 오면 언제라도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그 때문에 그가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 문제에 대해 입장을 선회했다고 해도 민주계가 그에게 가지는 호의는 매우 한시적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정발협은 5월23일 이대표가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 공개 불가 원칙을 수용한 것을 크게 환영하면서도 ‘그것과 경선과는 무관하다’며 분명한 한계를 그었다.

대선 자금 문제는 이대표로서는 김대통령을 압박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김대통령이 그동안 주례 회동 때 매번 이대표의 뜻을 따라 주었던 데는 이대표가 대선 자금 문제에 대해 강경 노선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대표는 경선이 두 달이나 남아 얼마든지 대세가 뒤집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너무 성급하게 대선 자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고도 볼 수 있다. 만약 김대통령이나 민주계가 이대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할 움직임을 보이더라도 더 이상 대선 자금 카드를 흔들 수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대표는 5월23일 기자 간담회에서 만약 검찰에서 대선 자금과 관련한 문제가 드러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법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는 별개’라며, 검찰에서 문제가 불거지면 정치적 입장을 고수할 생각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음모론의 시각에서 본다면 한번쯤 음미해볼 만한 발언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제 이대표가 주체적으로 대선 자금 문제를 정치 현안으로 부각할 수 없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한보 사건 이후 여권의 상황이 꼬이기만 했던 전례에 비추어 이번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 공개 불가 원칙도 돌발적인 사태에 의해 얼마든지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대선 자금 문제가 튀어나오거나, 야권의 폭로나 언론 보도에 의해 김대통령이 대선 자금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올 경우 총대를 멨던 이대표는 덩달아 정치적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대선 자금 문제 외에도 걸림돌은 있다. 이대표 측근들의 표현을 빌리면, 이대표는 타고난 싸움꾼이다. 어찌 보면 김대통령보다도 탁월한 싸움꾼이다. 김대통령은 3당 합당 당시 30여 명밖에 안되는 국회의원들을 이끌고 여권에 들어가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이대표가 신한국당에 입당할 때 측근이라고는 황우려 의원 한 사람뿐이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지 1년 만에 여당 대표 자리에 오르고, 지금은 다른 주자들의 협공을 받을 정도로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싸움닭 기질 덕택이었다. 그는 김대통령이나 민주계와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기 영역을 지켜 왔다.

하지만 그의 싸움닭 기질은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에게 도전하는 인물이나 세력과 싸우는 데는 능하지만 자신에게 의지하려는 사람들을 감싸안는 능력은 부족하다는 평을 곧잘 듣는다. 그는 얼마 전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썼던 기자와 소속 매체에 과격한 언사를 퍼부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이대표에게 호의적인 신한국당의 한 지구당위원장은 “이대표가 조금만 더 유연하게 처신했다면 벌써 게임이 끝났을 텐데 안타깝다”라고 말한다. 지구당위원장들이 이대표를 한번 보고 두번 보면 자꾸 가까워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김심·당심 한꺼번에 붙들기 전략

다른 대선 주자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주자들 중에는 내심 이대표와 연대하기를 꿈꾸는 인물들도 있는데 이대표가 전혀 곁을 주지 않아 반이회창 쪽으로 몸을 돌린 사람도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일찌감치 이대표 손을 들어줄 것 같은 자세를 보였던 김윤환 고문의 행보가 소걸음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김고문측은 여러 모로 유리한 상황에서도 이대표가 세를 불려 대세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아쉽게 여긴다.

신한국당 당직자들이 이대표를 평할 때 곧잘 하는 얘기가 있다. 마치 시골 학교에 전학온 서울 학생 같다는 것이다. 깔끔하고 말도 잘하고 성적도 뛰어난데 왠지 정이 안간다는 것이다. 결국 여권 인사들이 자신을 여당이 내세울 수 있는 최상의 카드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선선히 다가오지 않는 것이 이대표의 고민인 셈이다.

이대표도 최근 참모들과 만난 자리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의 고충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노력해도 좀처럼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대할 수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오랫동안 판사 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습성 때문이란다. 본래 판사는 직업 특성상 사교 생활을 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주변 사람들과 지나치게 정으로 얽히게 되면 ‘법대로’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도 눈을 잘 맞추지 않으며, 용건만 간단히 듣고 자리를 뜨거나,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머리에 새겨두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가 김대통령과 민주계의 최종 선택이 무엇일지 아직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도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 공개 문제를 덮고 넘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몸에 여권의 때를 묻혀야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 같다. 본인이 다소 상처를 입더라도 김대통령과 민주계 그리고 모든 여권 인사들이 안주할 수 있는 큰 그늘을 만들자는 계산이다. 그래서 김심과 당심을 한꺼번에 붙들어 보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민주계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대세를 장악하기에는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지 않는다는 초조감도 작용한 것 같다. 그의 한 측근은 “작은 것을 잃고 큰 것을 얻는다면 그런 거래는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며 이대표와 김대통령 사이에 주고받은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암시도 한다.

대선 자금 불공개 원칙 수용이 묘수가 될지 패착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대표의 최대 승부수가 될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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