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공산 불교계를 잡아라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6.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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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무주공산 ‘불교 표’ 다지기 경쟁 치열…佛子 모임·법회 연이어 개최
 
무주공산. 요즘 정치권은 불교 표를 이렇게 표현한다. 여야 차기 대권 주자군에 불자가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실제로 정치권을 대하는 불교계의 전반적인 정서가 이 한마디로 집약된다. ‘장로 대통령’이 등장한 이후 전통적으로 여권 성향이던 불교 표가 무너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정치권의 불심 잡기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대선이 앞으로 1년2개월이나 남은 점을 감안해 볼 때, 지나치게 빨리 불이 붙은 셈이다. 게다가 다른 종교는 잠잠한데, 유독 불교계에서만 정치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불교 표가 무주공산이기 때문이다.

우선 두드러진 점은 ‘야당의 불교 표 잠식’을 적극 방어하고 나선 여권의 움직임이다. YS를 대신해 불교계를 관리해온 서석재 의원은 지난 9월13일 서울 조계사에서 국회 불자 모임인 정각회 회장 취임 법회를 성대하게 치렀다. 불교 표와 사조직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를 복구해 내년 대선에서 킹 메이커로 발돋움하려는 서의원이 정각회 회장에 취임한 것은, 그 자체로도 결코 예사롭게 보아넘길 수 없는 사안이다.

다음날인 9월14일 신한국당 여의도 당사에서는 목탁 소리와 찬불가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함종한 의원의 당 불교신도회 회장 취임 법회였다. 이 날 신한국당은 당사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당 지도부 및 불교계 인사들을 대거 초청해 행사를 치렀다. 회장단 외에 고문단·운영위원·청년부 등을 둠으로써 명실공히 매머드 조직으로 탈바꿈한 신한국당 불교신도회는 이 달 말부터 TK 지역을 시발로 전국 조직을 정비해 나갈 계획이다.

아무튼 집권당 당사에서 대규모 법회가 열린 것은, 우리 정치 풍토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문민 정부 출범 이후 훼불사건, 조계사 사태, 국방부 예배 사건 등 불교계와 마찰이 극에 달했을 때에도 이처럼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 비춰보면, 지금 여권의 행보가 얼마나 파격적인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지난 8월 말 청와대 불자 모임인 ‘청불회’(회장 박세일 사회복지 수석)가 만들어진 것도 내년 대선을 겨냥한 여권의 불심 껴안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청불회는 내달 초 조계사에서 창립 법회를 가질 예정이다.

국민회의는 지난 9월16일 조계사에서 당 불자 모임인 ‘새연등회’(회장 박상규 부총재)를 출범시켰다. 이 날 창립 법회에는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이 직접 법어를 내렸고, 서석재 정각회장이 축사를 했다. 천주교 신자인 김대중 총재는 격려사 서두에서 “불교에 한없는 존경심과 향수와 그리움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민회의는 14대 때 2명이던 불자 의원이 15대 들어 12명으로 늘어난 점을 기화로 불교 표 공략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7월 말 버스 투어 당시 DJ는 당내 불자 의원들의 주선으로 예정에 없던 해인사 방문을 결행했다. 그의 해인사 방문은 ‘혜암 방장 스님과의 기념 사진’이라는 정치적 효과를 거두었지만, 본의 아니게 해인사 방장 스님 사임이라는 불교계 전대미문의 사건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해인사 방문 이후에도 DJ의 불교 공략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대통령 선거에 세 차례나 도전하면서도 그때마다 사실상 불교 표를 포기하다시피 해온 DJ로서는, 지금이야말로 불교계의 ‘반 YS 정서’를 자신의 지지표로 전환할 호기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난 9월10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한·중·일 불교 우호 교류 회의’ 만찬장에 정당 대표로는 유일하게 참석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현재 불교내 최대 종파인 조계종 승려의 약 60~70%는 호남 출신이다. 비록 불교계를 좌우해온 지역이 영남권이고 주요 사찰이 영남에 몰려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구성원을 놓고 보면 호남권의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DJ의 영남권 진출 전략에는 전국 주요 사찰에 포진해 있는 호남 출신 승려의 영향력도 염두에 두었을 법하다. “영남 지역 야당 위원장들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지만, 스님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불교계 사정에 정통한 한 여권 인사의 이같은 분석에는 설득력이 있다.

여당, 승가대학 진입로 공사에 50억원 지원

자민련도 만만치 않다. 자민련 불자회는 지난 2월 3당 중에 가장 먼저 창립했고, 참여율도 가장 높다. 불자 의원만도 전체 의원 49명 중에 박준규 김복동 박철언 한영수 구천서 의원 등 19명이나 된다. 자민련 불자회는 올 여름부터 매달 스님을 초청해 당사에서 법회를 갖고 있다. JP도 불교 표에 대한 관심이 높은 데다가, 당내 TK 세력의 불교 관리는 오랜 연륜을 자랑한다. JP는 지난 9월15일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우리들의 미래와 청소년을 위한 법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권이 불심 잡기 경쟁에 몸이 바짝 달아오른 데 반해, 정작 내년 대선에서 불교 표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반적인 정서는 반 YS 성향을 보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야로 돌변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불교계 인사들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물론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는 데에는 화력이 튼튼한 여당이 유리하다. 불교계 숙원 사업을 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최근 신한국당은 내무부와 경기도를 설득해서, 경기도 김포 승가대학 진입로를 닦는 데 드는 비용 50여 억원을 부담하도록 했다.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야당으로서는 넋놓고 지켜볼 도리밖에 없다.

그러나 종단 상층부의 요구를 해결해 준다고 해서, 고구마 줄기 뽑듯 불교 표가 다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조계종만 하더라도 조직이 ‘서의현 총무원장 시절’처럼 일사불란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총무원의 지도력은 전국 24개 교구 본사와 말사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미치지 않는다. 말사 주지 임명권도 사실상 각 문중이나 본사가 행사하고 있다. 또한 불교계 내부의 개혁 세력 대 보수 세력의 갈등도 중요한 변수이다.

결국 다양하게 갈라져 있는 불교계의 각 세력을 일일이 접촉해야 한다. 예전보다 훨씬 섬세하게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말 그대로 ‘불심’을 잡아야만, 무주공산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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