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TV 토론 ‘예정된 실패작’
  • 張榮熙·李叔伊·金恩男 기자 ()
  • 승인 1997.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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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 시비 피하려고 기획부터 방송까지 ‘몸사리기’ 일관…‘후보 합동 토론’이 대안
오후 4시가 되자 MBC 지하 1층 간부 식당 문고리에 ‘회의중’ 팻말이 걸렸다. 7월28∼30일 열린 한국방송협회·한국신문협회 주최 대선 후보 초청 텔레비전 토론 마지막 날. 사회자와 패널리스트를 포함해 토론회 제작 실무진 10여 명이 모인 식당의 분위기는 그다지 밝지 못했다. 6시간 뒤 있을 생방송에 대한 중압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문들이 너무 씹어대는 것 아닙니까.” 현직 방송인인 패널리스트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토론이 정책 중심으로 가면 포맷이 단순해지고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데.” 다른 패널리스트가 말을 받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청률이 너무 낮아요. 회사(방송사)에 비상이 걸렸어요.”

텔레비전 토론회가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은 것은 첫날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의 토론이 끝난 직후부터였다. 재미도, 유익함도 주지 못하는 토론회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토론을 공동으로 주관한 방송 3사는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방송 3사에 따르면, 이번 토론회는 ‘공정성’과 ‘정책 중심 토론’을 양대 중심 축으로 삼았다. 사회를 맡은 유재천 교수(한림대·한국방송학회장)는 토론회를 시작할 때마다 이 점을 강조했다.

MBC 고 진 보도제작국장은 최소한 공정성 문제에서만큼은 이번 토론이 모범을 창출했다고 자평했다. 특히 제작 분야의 경우 카메라 각도·움직임뿐 아니라 자막 횟수처럼 미세한 부분까지도 후보 간에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는 것이다. 제작에 참여한 한 프로듀서는 “후보마다 컷 수를 초 단위까지 똑같이 배분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라고 말했다.

패널리스트 또한 공정성 시비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지난 5∼6월 신한국당 후보가 결정되기 이전 신문 3사와 방송 3사가 세 차례 토론회를 벌였을 때만 해도 패널리스트의 부담은 덜했다. 소속사 기자들이 대선 예비 주자에 대한 두툼한 정보 파일과 ‘문제 은행’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패널리스트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했다는 것이 고국장의 말이다.

패널리스트들은 또 토론회가 열리는 사흘 동안 대학 입시 출제 위원처럼 ‘시한부 유배 생활’을 감수했다. 1차 리허설이 열리는 오후 4시부터 생방송이 시작되는 10시까지 방송사는 이들의 개별 행동을 엄격히 막았다. 질문 내용이 밖으로 새어나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외부와 접촉이 끊긴 상태에서 이들은 각자 준비해 온 예상 문제를 꺼내 놓고 질문의 강도와 난이도를 조정했다. 방송 진행 중에는 후보들 못지 않게 표정과 몸짓을 관리해야 했다. 패널리스트로 토론에 참여한 구본홍 MBC 보도부국장은 “첫날 이회창 후보 답변에 패널들이 함께 웃었다는 이유로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다음날부터 마음대로 웃지도 못했다”라고 털어놓았다.

후보측에서 오히려 “질문 강도 높이라” 주문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공정성이 거꾸로 이들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실무진은 준비 과정에서 이회창 후보의 토론회를 ‘시금석’이라 불렀다. 단순히 맨 처음 순서여서가 아니었다. 여당 후보의 토론회에서 얼마나 수준 높고 날카로운 질문과 답변이 오가느냐에 따라 나머지 토론회의 성격도 규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날 사회자와 패널리스트가 받은 평가는 최악의 것이었다. 공선협 서울지부 산하 TV토론 시민평가위원회는 △백화점식·나열식 질문 내용 △부적절한 질문 방식 △태부족한 추가 질문과 보충 질의 △방만한 시간 관리 등을 이들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대표적으로 지적된 것이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 기피 의혹을 다룬 질의였다. 이에 대해 이후보는 무려 6분26초에 걸쳐 자신의 입장을 밝혔는데, 이는 이회창·김종필·김대중 세 후보의 총 답변 1백78개 가운데 가장 긴 시간이었다. 문제는 답변 제한 시간(2분)을 이후보가 두 차례나 넘겼는데도 사회자가 제지하지 않고, 패널리스트 또한 보충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유교수는 “이후보가 뭔가 자료를 제시하며 설명할 듯한 분위기여서 기다리다 보니 도중에 제지할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라고 해명했다.

패널리스트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질문을 한 유자효 SBS 해설위원은 이 문제와 관련해 △내 키가 179㎝이고 젊은 시절 ‘비아프라’라고 불릴 만큼 말랐지만 몸무게가 61㎏ 아래로 내려간 일은 없다. 큰아들 병역 문제는 어떻게 된 것인가 △둘째아들도 체중 미달로 병역을 면제받았다던데, 우연의 일치인가 △법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 해도 도덕적인 책임을 느끼지는 않는가, 이렇게 세 가지 질문을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첫번째 질문을 던지자마자 이후보가 ‘알아서’ 나머지 문제까지 줄줄 대답해 버렸기 때문에 미처 보충 질문을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해명이 일반 시청자에게 통할 리 만무했다. 일각에서는 ‘솜방망이 질문’이 난무한 가운데 후보를 검증하기는커녕 후보에게 해명할 기회만을 제공한 토론회라는 혹평도 쏟아졌다. 더구나 이미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이상 나머지 두 후보에게만 ‘쇠방망이’를 휘두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시청률은 곤두박질쳤다(그림 참조). 그러다 보니 마지막 차례인 김대중 후보의 경우 토론에 임하기 전 후보측이 방송사에 대고 ‘질문 강도를 높여 달라’고 당부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상황이 이쯤되자 정치권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텔레비전 토론이 끝난 직후만 해도 여야 3당은 저마다 자기 진영 후보가 ‘선방했다’고 자화자찬을 했다. 그러나 여론이 계속 나빠지자 이들은 일제히 ‘후보의 자질을 제대로 검증하기 어려운 의미 없는 토론회였다’고 칼을 빼들었다. 이회창 후보 진영의 박성범 의원은 아예 ‘매번 비슷한 형식이 반복될 양이면 앞으로 일정이 잡혀 있는 토론회 횟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정 선거 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후보들은 텔레비전 토론을 13회 남겨놓은 상태이다(지역 텔레비전 토론 제외).

김대중 후보 진영의 김한길 의원은 ‘이렇게 재미 없는 토론회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김총재가 텔레비전 토론 참여를 중단할 수도 있다’고 방송사 간부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유권자들의 정치 무관심을 청산할 유력한 수단이던 텔레비전 토론마저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릴 양이면 ‘선거 전략 차원에서라도’ 이를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거부하다가 선거 직전에야 토론회에 응함으로써 효용을 극대화하는 전략, 이는 텔레비전 토론에 능했던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84년 재선 당시 써먹은 수법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같은 극단론까지 나오게 된 배경이다. 유교수는 사회를 보는 도중 ‘이 토론회는 정책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딱딱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라며 양해를 구하곤 했다. 그러나 토론회가 딱딱해진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방송 3사가 텔레비전 토론을 주관하는 현행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방송협회와 신문협회가 텔레비전 토론을 공동 주최하기로 결정한 것은 지난 7월 초. 토론회 유치를 둘러싼 언론사간 경쟁이 사운을 거는 양상으로까지 치닫자 양대 협회가 자구책 차원에서 마련한 합의였다. 그러나 방송 3사가 토론회를 공동 주최하려다 보니 문제가 하나 둘 발생했다.

패널리스트 선정부터 그랬다. ‘의전상’ 방송 3사에 1명씩 배정하다 보니 전체 5명 가운데 3명이 방송인인 불균형이 나타났다. 더욱이 이들 3명은 모두가 정치부 기자 출신이었다. 공선협 시민평가위원회는 이같은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방송사 또한 이에 수긍했다. 그러나 방송사간 미묘한 알력 때문에 비슷한 경력을 가진 중견 간부들을 배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방송사 관계자의 말이다.

전문가들 “주제별 토론해야 깊이 있는 논의 가능”

토론이 분야 별로 깊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는 이같은 패널리스트 구성에도 책임이 있다고 김승수 교수(전북대·언론학)는 지적했다. 김종필 총재의 한 측근은 권력의 생리에 가장 민감한 조직이 방송사라고 전제한 뒤, 방송인 출신 패널리스트는 여당 편향일 수밖에 없다는 데서 토론이 부실해진 이유를 찾았다. 야당 후보에게만 비판적인 질문을 하자니 공정성 시비가 일 것 같아 전체적으로 질문을 ‘하향 평준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방송 3사가 공동으로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의사 결정 구조 또한 유연하지 못했다. 7월27일 대림동 스튜디오에서 예행 연습하던 김대중 총재는 토론회 진행 방식을 보고받다가 ‘방청객이 없다’는 대목에 이르러 벌컥 화를 냈다. 방청객이 없으면 토론회의 활기가 떨어진다는 지적이었다. 박지원 총재 특보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서둘러 방송사측과 이 문제를 상의했지만 다음날이면 이회창 대표의 토론회가 시작되는 터라 바꿀 방도가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그보다 앞선 7월25일에는 8개 사회·시민 단체로 구성된 자문위원단이 정치 부문 질의(35분)를 줄이고 민생과 관련된 경제 부문 질의(15분)를 늘리자고 제안했으나 이 또한 일정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작 실무를 맡은 MBC의 한 프로듀서는 “토론 형식·운영 방식에 관한 웬만한 합의는 이미 방송 3사 사장단 선에서 끝나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는 어떤 창조적인 아이디어도 개입할 틈새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욕을 먹건 칭찬을 듣건 방송 3사가 공동 운명체라는 생각에 더 이상 시도하기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번 토론을 ‘예견된 실패작’이라고 불렀다.
언론사들은 최근의 비판 여론을 비켜갈 최상의 출구로 후보간 합동 토론을 꼽는다. 이는 일반 유권자의 요구이기도 하다. 최근 공선협이 서울시에 거주하는 성인 남녀 천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후보 간에 직접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응답률이 77.5%에 달했다.

여야 3당 또한 이같은 여론을 의식한 듯 합동 토론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로 돌아서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입장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자민련은 ‘밑질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본래부터 합동 토론에 적극적이었다. 국민회의는 8월1일 간부 간담회를 열어 ‘선거 운동 기간(11월26일∼12월17일) 전까지는 분야 별로 개별 토론을 벌이되, 선거에 임박해서는 후보간 합동 토론을 진행한다’는 당론을 확정했다. 선거 운동 기간 전 합동 토론회는 야당 후보 단일화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한국당 또한 과거와 달리 합동 토론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비치고 있다. 비록 ‘선거 운동 기간에 한해서’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전국 지지도 1위를 달리는 상황에서 굳이 능수능란한 야당 후보들에게 반격할 기회를 줄 필요가 있겠느냐’는 태도를 보여 왔던 신한국당으로서는 그나마 달라진 모습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후보간 합동 토론이 성사된다 해도 신문·방송사가 토론회를 주최하는 지금과 같은 구조에서 합동 토론의 의의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시사저널> 텔레비전 토론 자문단은 한결같이 주제별 토론회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토론회처럼 짧은 시간 동안 정치·외교·사회·문화 모든 주제를 다루는 방식으로는 깊이 있는 토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사에 이 문제를 맡겨둘 경우 저마다 인기 분야만을 맡으려고 고집해 주제별 토론회 자체가 무산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후보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도 겉만 화려하고 실속은 없는 토론이 반복될 공산이 큰 것이다.

세 차례에 걸친 토론회가 끝난 뒤 유재천 교수는 “사회를 맡아 보니 텔레비전 토론을 언론사에만 맡겨 놓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도 나서서 총대를 메겠다”라고 선언했다. 자기가 회장으로 있는 방송학회와 언론학회 등 학계와 시민단체가 손을 잡고 미국의 텔레비전 토론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김정기 교수(한국외국어대·신문방송학)는 이같은 기구를 만드는 데 찬성하지만 관훈클럽·여의도클럽·한국기자협회 같은 언론인 단체가 이 기구의 주력 부대가 되는 것이 한국 실정에 비추어 바람직하리라고 제안했다. 태어나자마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텔레비전 토론을 바로잡을 대안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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