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메이커’ 전병민이 움직인다
  • 최진 기자 ()
  • 승인 1996.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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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김 정권 창출한 책사…97 대선 앞두고 차기 주자들과 물밑 교섭중
 
전병민. 정치권에서 그만큼 유명세와 익명성을 동시에 지닌 인물도 드물다. ‘대통령 만들기 전문가’ ‘정책 기획의 귀재’ ‘YS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등 전씨를 따라 다니는 수사는 자못 화려하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이 큰 일을 벌일 때마다 구설에 오르내리면서도 좀체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베일 속의 책사’였다.

그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은 현 정권 출범 직후인 93년, 46세의 젊은 나이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에 내정되었을 때다. 그러나 장인이 고하 송진우 선생의 암살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그는 내정된 지 3일 만에 다시 음지로 숨어야 했다. 음지로 잠행한 이후에도 여권의 막후 책사로 끊임없이 오르내리던 전씨가 정치권의 시계에서 완전히 멀어진 시점은 지난 2월.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소문이 무성하자 1년 기한으로 하와이 동서문화센터로 훌쩍 떠났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다시 한번 정권 창출에 기여하고 싶다는 한마디를 남긴 채.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그가 태평양을 건너간 지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요즘 정가의 안테나에는 그의 심상찮은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다. 이른바 전병민 재발진설이 그것이다. 대권 주자들의 행보가 활발하던 지난 5월 말 전씨는 아무도 몰래 국내에 들어왔다. 지난 4월13일 귀국해 보름 정도 머물다 떠난 지 10여 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잠행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여권의 차기 주자들이었다.

귀국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전씨에게는 차기 주자들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여러 군데서 들어왔다. 전씨는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반이나 남아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특정 주자에 기우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완전히 귀국한 다음에 보자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현 정권과 여전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로서는 매사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하 활동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가 어느 중진과 물밑 흥정을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전씨 주변 사람들도 몇몇 차기 주자들로부터 ‘당신의 두뇌를 빌리고 싶다’는 유혹의 손길이 뻗쳐온 사실을 일부 시인했다. 요컨대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을 수는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벌써부터 특정 주자와 손을 잡는 데 대해 그 측근은 “YS의 임기가 3분의 1이나 남아 있는 상태에서 누가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겠느냐”라고 되물었다.

전병민 보고서 ‘이홍구 체제에 무게 실어라’

그런데도 요즘 정가에 가장 많이 떠도는 소문은 전씨가 ‘이홍구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대표의 한 측근은 대권 주자에게 접근하기 위한 전병민씨 특유의 심리전일 가능성이 높다며 소문을 일축했다. 하지만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지난 5월 말 이대표측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 전씨에게 협조 의향을 타진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어쨌든 차기 주자들이 전씨에게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권에서 전씨만큼 권력의 속성을 깊숙이 꿰뚫어보고 정권 창출의 노하우를 가진 아이디어맨도 드물기 때문이다. 전씨의 이력이 그것을 입증한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뒤 형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기획·홍보 기법을 익힌 전씨는 3공화국 말엽 20대 중반에 중앙정보부와 밀접하게 연관된 월간지 <북한>의 편집부 직원으로 들어가 정치 권력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5공 초기에는 사회정화위원회가 발행하는 잡지 <정화>의 편집 책임자로 일하다 곧바로 현대사회연구소로 옮겼고, 6공 출범 때는 한가람기획단을 만들어 ‘보통 사람의 신화’를 창조해 냈으며, 92년 대선 때는 임팩트 코리아라는 사조직을 이끌며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3공에서 5,6공을 거쳐 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25년 동안 권력 이동기마다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면서 방대한 인맥을 형성하고 권력의 속성을 터득했다.

그는 또 보고서 작성의 귀재로 불리기도 한다. 전개될 상황을 미리 전망하면서 그에 따른 대응 전략을 하나하나 제시하는 이른바 ‘전병민 보고서’는 정치권에서 유명하다. 전씨의 보고서를 본 적이 있는 여권의 핵심 인사는 “중언부언하지 않고 가장 고민스러운 대목만 골라 대안을 간단 명료하게 제시하는 그의 보고서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게 할 만도 하다”라고 말했다.

요즘 정계 일각에는 전병민 보고서 내용의 일부가 나돌고 있다. ‘대권 논의를 일절 금지하고, 이홍구 체제에 무게를 실어주되 후계 구도는 최대한 늦춰야 한다. DJ와 JP의 연대는 YS에게 결코 불리한 구도가 아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권의 흐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전씨는 귀국 이후 대권 문제에 안심하고 참여할 만한 합법적인 공간으로 현대사회연구소(현사련)를 택한 것 같다. 현사련은 전씨가 81~87년 편집장과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남다른 애정을 쏟은 곳이다. 87년 직원들과 마찰을 일으켜 불명예 퇴직한 그는 두고두고 아쉬움을 느껴왔다고 한다.

전씨는 현사련 소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94년부터 여권 고위층을 통해 끈질기게 로비를 벌였다. 지난 5월에도 그는 이 문제로 정부 고위 인사들을 두루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정치권의 포화를 피하면서 정권 창출에 참여하기에는 현사련이라는 연구기관이 안성맞춤이다. 과거 현사련에 몸담고 있을 때도 전씨는 주위의 눈길을 거의 받지 않으면서 5공 정권에 깊숙이 관여했다.

차기 정권 과제·대안 담은 ‘미래 서적’ 집필중

지금 전씨는 책을 두 권 쓰고 있다. 하나는 자신이 지금까지 일해온 정치 역정을 담담히 그려낸 자전적 에세이집이고, 다른 하나는 다음 정권이 해야 할 정책 과제와 대안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분야 별로 총정리한 ‘미래 서적’이다. 여권 일각에서는 이 미래 서적을 대권 시장에 내놓은 매물로 보기도 한다. 차기 주자들에게 ‘나를 써달라’고 하는 손짓이라는 얘기다.

전씨가 한사코 정치권에 고개를 내밀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 전씨의 심기는 대단히 불편하다. 그는 현 정권 출범에 1등 공신이면서도 3일 간의 정책수석 내정자 외에 3년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공식 직함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권력 이동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으니 미래가 불투명한 전씨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자신의 버팀목인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와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여권 핵심부로서는 청와대 정책수석 내정 때 크게 낙마한 그를 다시 중용할 수도 없고, 줄 자리도 마땅치 않아 계륵처럼 여기고 있는 상황이다.

특이하게도 전씨는 역대 정권과 번번이 개운치 않게 결별했다. 항상 장막 뒤에서 일했고, 변변한 자리 하나 꿰차지 못한 채 다음 정권으로 발을 디디곤 했다. 그는 집안에서도 외톨이였다. 9남매의 넷째인 그는 지난해 6월 조카 결혼식장에 잠깐 얼굴을 내민 것을 빼고는 지금까지 1년 동안 집안의 경조사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을 정도다. 대학 교수 출신인 부인 한 아무개씨와 장모와 함께 세 식구가 사는 성북동 집을 찾는 사람도 거의 없다. 외롭게 살고 외롭게 일한 전씨의 유일한 낙은 대통령 만들기였던 셈이다. 과연 그는 다음 정권에서도 또 한번 대권 제조기 노릇을 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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