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회담서 소외된 통일원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5.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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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적 태도로 일관, 제몫 못챙겨···“대북 접촉 전문가에게 맡겨야”
통일원은 과연 북한에 쌀을 지원하기 위해 북경에서 열린 1, 2차 남북한 차관급 쌀 회담에서 소외되었는가. 사실이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와 관련해 통일원이 주장한 것처럼 재정경제원 이석채 차관이 쌀 회담의 한국측 수석 대표를 맡기에는 능력과 전문성이 역부족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일정을 잡고 있지 않지만 머지않아 속개될 것으로 보이는 3차 쌀 회담에서 한국측 수석 대표는 어느 부처가 맡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 두 가지 문제는 지난 8월16일 열린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불거져 나왔다. 외통위는 북한이 쌀 수송선인 삼선 비너스호 선원의 사진 촬영을 문제 삼아 선원 21명과 선박을 억류하고 8월10일로 예정되었던 3차 쌀 회담을 거부한 사태의 전말을 조사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여·야 의원들은 일제히 쌀을 무상 지원했는데 북한이 수송선을 억류하고 3차 회담을 거부한 것은 기본적으로 쌀 회담을 잘 못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정부를 공격했다.

특히 야당 의원들은 쌀 회담에서 통일 정책의 주무 부처인 통일원이 소외된 것에 정부 공격의 초점을 맞추었다. 대북 관계 전문성을 갖고 있는 통일원이 쌀 회담 대표단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기에 ‘쌀을 주고도 뺨을 맞았다’는 비판이었다. 야당의 이러한 ‘통일원 편들기’는 <시사저널>이 1, 2차 쌀 회담은 무역진흥공사 홍지선 북한실장이 청와대와 안기부의 협조 아래 막후에서 북한측과 협상한 덕에 타결되었다는 기사를 실으면서 비롯되었다(<시사저널> 제303호 참조).

외통위 회의에서 나웅배 통일원장관 겸 부총리는 여·야 의원들로부터 추궁을 받자 통일원이 1, 2차 쌀 회담에서 사실상 소외된 것을 인정했다. 그는 또 재경원 이석채 차관이 쌀 회담의 한국측 수석 대표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의원들의 주장에 동조해 대통령에게 수석 대표 교체를 건의하겠다고 답변했다(이는 나중에 없었던 일이 되었다).

어쨌든 나부총리의 발언은 마치 통일원이 쌀 회담을 주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쌀을 무상으로 주고도 북한에 휘둘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통일원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쌀 회담을 주도했다면 결코 인공기 게양이나 사진 촬영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모든 문제가 북한을 모르는 청와대나 재경원의 비전문가들이 쌀 회담을 주도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쌀 수송선 귀환 작전 “아마추어리즘의 극치”

그러면 통일원 관계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통일원이 정말 1, 2차 쌀 회담에서 소외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해서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통일원이 자초한 일이라는 것이 이 문제에 정통한 정부 고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이 정부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이 쌀 회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 대표단 구성을 청와대가 주도했다. 그렇지만 통일원이 통일원 중심으로 대표단을 구성하자고 주장했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통일원은 애초부터 쌀 회담을 주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판단을 하게 된 근거로, 대표단에 통일원 관계자가 1명밖에 포함되지 않았는데도 통일원측이 전혀 반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대북 정책과 거리가 먼 청와대 한승수 비서실장의 직속 비서관 1명과 경제 담당 비서관 1명, 외무부 관계자 1명이 대표단에 포함된 것을 보면 결과적으로 통일원이 제 밥그릇을 챙기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통일원이 쌀 회담에서 소외되지 않았느냐는 외통위 소속 의원들의 ‘동정’에 나부총리가 동의한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이 정부 고위 관계자의 지적이다. 그는 “애초부터 제몫 챙기기를 포기해 놓고 이제 와서 볼멘 소리를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런데도 통일원이 야당 의원들의 동정 발언에 힘입어 쌀 회담 주도권을 억울하게 다른 부처에 빼앗긴 것처럼 언론에 흘린 것은 적반하장이다”라고 비판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쌀 회담이 청와대가 가동한 재미 교포 비선 조직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야당 의원들의 주장에 통일원이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앞서의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번 쌀 회담은 청와대와 안기부의 협조를 얻어 무역공사와 북한측 삼천리총회사가 막후에서 노력한 덕분에 성사되었다”고 못박았다. 때문에 이번 1, 2차 쌀 회담을 거치면서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과 최형우 의원이 갖고 있던 재미 교포 비선들이 모두 와해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통일원이 쌀 회담을 주도했다면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현실과 거리가 멀다. 이렇게 판단한 근거로 우선 통일원이 청진항에 억류되어 있는 삼선 비너스호의 선원 21명과 선박을 귀환시키기 위해 북한과 당국자 접촉을 시도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을 보면 도대체 통일원이 스스로 평가하는 것처럼 북한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부처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고 상당수 북한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북한이 삼선 비너스호 선원의 청진항 사진 촬영을 문제 삼아 선원과 선박을 억류하면서 8월10일로 잡힌 3차 쌀 회담을 거부한 때가 8월8일께이다. 삼선 비너스호의 귀환을 위해 통일원의 김형기 정보분석실장이 북한 당국자와 회담을 갖고자 북경을 방문한 것은 그 다음날이다. 그런데 문제는 통일원이 북한 당국 앞으로 회담을 요청하는 팩스를 보낸 시각이 김실장이 북경에 도착하기 고작 2시간 전이라는 데 있다. 이 사실은통일원측을 통해 확인됐다.

남북 회담에 정통한 또 다른 정부 고위 관계자는 “통일원이 삼선 비너스호를 귀환시키기 위해 북한 당국과 회담하고자 시도한 방법은 아마추어리즘의 극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사실 1차 북경 쌀 회담에서 타결된 합의서 7조에는 남북 쌀 사업으로 야기되는 문제는 양측 대표가 협의하여 해결하기로 되어 있는데도 통일원은 북측에 사전 타진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취한 뒤 2시간 만에 대표를 북경에 파견함으로써 북측에 책을 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김실장이 북경에 도착해 북한 당국자를 어떻게 만나서 삼선 비너스호 귀환 문제를 논의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북한 당국자와는 만나 보지도 못했다. 결국 삼선 비너스호 귀환 문제는 8월7일부터 북경에 와있던 무역공사 홍실장이 북한 대외경제협력추진위 이성덕 참사와 협의해 타결했다. 그런데도 외통위에서 김실장은 자기가 직접 북한 당국자와 담판지어 비너스호의 귀환이 결정되었다고 허위 보고했다가 들통이 나서 망신을 당했다.

바로 이 점에서, 통일원이 비록 대북 정책을 다루는 주무 부처이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전략적이지도 못하다는 사실이 검증되었다는 지적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광복 50주년 기념사에서 설사 획기적인 제의는 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남북 관계의 기본 원칙을 다시금 천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도 쌀을 싣고 간 배와 선원을 북한측이 억류하고 있는 실정을 통일원은 도외시하고 “현장 확인을 해야 한다”는 말만 할 뿐 삼선 비너스호의 조기 송환에는 거의 대책이 없이 허송 세월했다. 통일원의 이러한 자세에 대해 한 북한 전문가는 “이로써 북한을 잘안다는 통일원의 자부가 허장 성세였음이 입증되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앞서의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북한이 사진 촬영과 같은 사소한 것을 문제 삼아 선원과 선박을 억류하는 이상 겉으로는 잘못을 인정하고 하루 속히 귀환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나중에 그러한 행위를 한 적이 없는데 북한 당국이 억지를 부렸다고 맞받아치면 된다. 이것이 대북 관계를 현실적으로 풀어가는 지혜다. 그런데 통일원의 태도는 선원과 선박의 장기 억류를 가져올 수 있는 어설픈 것이었다.”

‘순진한’ 쌀 회담 수석 대표도 문제

북한을 제대로 몰라 대북 관계를 그르치고 있는 것은 통일원만이 아니다. 쌀 회담의 한국측 수석 대표인 이석채 차관도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1, 2차 쌀 회담 진행 과정에 대해 앞서의 정부 관계자는 “이차관은 북한 대표들이 열 마디 말하면 백 마디를 했다. 북한 당국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여 듣고서 협상을 해야 하는데 이차관은 그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북한 대표들이 이차관을 순진무구한 사람으로 보았다”고 덧붙였다.

이차관의 이러한 협상 자세와 관련한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쌀 회담이 계속되던 어느날 저녁 남북한 대표들이 술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이차관은 북측 대표들에게 자신이 한국 관료 사회에서 알아주는 논객이라고 자랑했다는 것이다. 물론 관가에서는 그의 논리가 정연하다는 평이 있다. 그러나 쌀 회담과 관련된 주석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대북 협상에서 문외한인지를 보여준다고 북한 전문가들은 비판한다.

앞서의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차관이 쌀 협상의 수석 대표를 맡았다는 것은 우리의 대북 정책이 얼마나 혼선을 빚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 대표단이 전금철 같은 노동당 대남사업 당국자들로 구성된 이상 우리도 당연히 국가안전기획부의 노련한 대북 전략가들을 회담 대표로 구성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쌀 회담이 단순히 쌀을 무상 지원하기 위한 회담이 아니라 남북 정치·경제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회담이기 때문이다.”

결국 쌀 회담을 거치면서 통일원의 대북 정책은 한계를 보였다. 때문에 북한 전문가들은 통일원의 역할을 장기적인 통일 정책을 연구하고 수립하는 쪽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반면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쌀 무상 제공과 남북 정상회담같이 국민의 생존과 관련된 사업에서는 북한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여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하므로, 대통령이 다른 국가 기관에 이 일을 맡겨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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