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편집국은 ''정치 사관학교''
  • 文正宇 기자 ()
  • 승인 1995.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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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들 여야 ‘실세’로 떠올라…내각에서도 강세
올해 3월 지방 선거 정당 공천 문제를 둘러싸고 여야가 날카롭게 대립해 민주당 의원들이 황낙주 국회의장 공관과 이한동 부의장 사저를 점거했을 때 일이다. 당시 이부의장은 출입 기자들에게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다. 아무개 아무개 기자는 눈에 띄게 특정인을 대변하는 듯한 기사를 쓴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여당 출입 기자 중에서 어떤 기자가 누구 사람인지 다 안다. 제발 그런 식으로 기자 생활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가 지칭한 특정인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당시 일부 언론에는 김윤환 당시 정무장관이 여야를 넘나들며 파국을 막기 위해 맹활약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언론계 출신, 군 출신 능가할 세력으로 성장

이번에 민자당 당직 개편의 뚜껑이 열리자 출입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내뱉은 말은 “이제 취재하기 좀 쉬워지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여당 지도부가 모두 말이 통하는 사람들로 짜였다는 얘기이다. 전임 이춘구 대표나 김덕룡 총장 체제는 사실 기자들이 취재하기에는 최악의 포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집을 개방하지 않고 기자들과 사적인 접촉도 즐기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반면 신임 김대표나 강총장의 집과 사무실은 언제나 기자들에게 개방돼 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이 당의 요직을 맡지 않고 있을 때도 그들 주변은 언제나 기자들로 붐볐다. 그런 두 사람이 당의 대표와 총장이라는 지도부 핵심 자리에 기용됐으니 기자들이 반기는 것은 당연하다.

기자들이 김대표나 강총장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데는 그들의 인간적인 친화력과 함께 두 사람 모두 기자 출신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김대표는 <조선일보>에서 정치부 기자와 주미 특파원·주일 특파원을 거치면서 16년간 기자 생활을 했다. 강총장은 12대 때 32세라는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기 직전까지 4년여 <경남신문>에서 정치부 기자를 했다.

민자당에 김대표와 강총장 체제가 들어섬으로써 정치 사상 처음으로 여당의 핵심 지도부를 언론계 출신이 점령하게 됐다. 김영삼 정부 들어와서 나타나고 있는 두드러진 현상은 언론인 출신들의 활약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2년 반이 지나면서 언론인 출신들은 그동안 정치권을 좌지우지해온 군 출신들을 대신할 수 있는 세력으로까지 성장했다. 지난 2년 반 동안 김영삼 대통령이 내각에 영입한 학계와 법조계 출신 인사들이 채 뜻을 펴보지 못하고 도중 하차했지만 언론계 출신들만은 건재하다.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오인환 공보처장관은 지금까지 김대통령이 임명한 장관 가운데에서 최장수를 누리고 있으며,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주돈식씨도 청와대 공보수석을 거쳐 문화체육부장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과 함께 언론계 영입 케이스로 김영삼 정부에 들어간 <동아일보> 논설위원 출신 이경재씨도 현재 공보처 차관으로 있다. 그러고 보면 김영삼 정부에 들어간 언론계 출신 중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인사는 한 사람도 없다.

일찍부터 정치권에 들어와 있던 언론계 출신 인사들도 민주계건 민정계건 가릴 것 없이 대개 중용되고 있다. 언론계 출신의 대부격이라 할 수 있는 이만섭 의원은 국회의장, 남재희씨는 노동부장관, 이민섭 의원은 문화체육부장관을 지냈고, 김용태 의원과 김중위 의원은 현재 각각 내무부장관과 환경처장관을 맡고 있다. 그밖에 서청원·박범진·최재욱·하순봉·김기도·강용식 의원이 당직을 맡았으며, 민주계인 신상우 의원과 강인섭 의원은 당정 개편이 있을 때마다 중용이 점쳐질 정도로 민주계의 중요한 예비 자원이다. 현재 여권에 남아 있는 언론계 출신 가운데 이렇다 할 눈길을 받지 못하는 인사는 과거 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던 곽정출·이웅희·김길홍·이환의 의원 정도이다.
언론계 출신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기는 야권도 마찬가지이다. <동아일보> 출신인 김원기 의원은 김대중씨의 국민회의 창당에 반기를 들고 민주당에 남아 구당파를 사실상 이끌고 있다. 그는 민주당의 과도 체제가 끝나면 이기택 총재와 당권을 놓고 격돌할 것으로 보인다. 그가 민주당의 당권을 거머쥐면 정치 사상 처음으로 언론계 출신이 자력으로 야당 총재에 오르게 된다. 5공 시절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국민당 총재를 맡은 적이 있지만 그 때는 야당 유력 정치인들의 발이 대부분 묶여 있던 상황이었다. 같은 <동아일보> 출신인 이부영 의원도 일찍부터 신당 참여를 거부하고 야권의 차세대 주자로서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세대 교체를 원하는 정치 세력과 외부 세력의 대안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매김을 해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언론계 출신으로 대권까지 넘볼 수 있는 인물로 자신을 관리하고 있다.

이부영 의원과 <동아일보> 동기인 임채정 의원은 국민회의에서 김대중 위원장의 ‘머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는 현재 창당을 전후한 업무를 총괄하는 기획단 단장을 맡고 있다. 초선으로서 정치개혁모임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정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그는 동교동계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론가로 통한다. 김대중씨가 현재 차기 대통령감으로서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가정이 성립한다면, 그는 언론계 출신 중에서 ‘대통령 만들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민련에는 김종필 총재 비서실장인 이긍규 의원이 있다. <경향신문> 정치부 차장과 기자협회 회장을 지낸 그는 일찌감치 김종필 총재의 편에 서서 자민련 창당을 주도해 왔다. 그는 지난 지방 선거 때 김총재를 그림자처럼 따르면서 후보 영입과 선거 전략을 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현재 자민련에서 그의 위상은 통상적인 비서실장 자리를 뛰어넘는다.

그밖에 <한국일보> 출신 조세형 의원과 <중앙일보> 출신이며 기자협회 부회장을 지낸 홍사덕 의원도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 경선 때 상당한 득표를 해 차세대 주자로서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했다. 서울시장 경선 때 김대중 위원장이 조 순씨를 영입하지 않았으면 서울시장 자리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차지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국회의원 2백99명 중 언론계 출신은 34명에 달한다. 11%가 넘는다. 13대 때(26명)에 비해 8명이나 불어났다. 지난 지방 선거 때는 언론인 출신 55명이 출사표를 던져 12명이 당선됐다. 기자협회 회장과 <한겨레신문> 이사를 지낸 김태홍씨가 광주 북구청장, <조선일보> 사회부 출신 동문성씨가 속초시장, <경향신문> 의정부지국장 홍남용씨가 의정부시장, <한겨레신문> 기자 유종필씨가 서울시 의원에 각각 당선됐다.

낮에는 기자실에, 밤에는 계보 사무실에

총선을 앞두고 여야 각 당이 새 인물 영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에 언론계 출신들의 정계 진출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미 박성범씨와 이윤성씨가 봉두완·하순봉으로 이어져온 앵커 의원의 전통을 물려받기 위해 민자당으로, <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출신인 문학진씨와 <동아일보> 조사연구실장 출신인 장성원씨는 국민회의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인 30대 심양섭씨도 전격적으로 자민련으로 옮겨 언론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현재 언론계에서는 누구누구가 어떤 당의 영입 교섭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형편이다.

언론계 출신이 정계에서 각광받는 까닭은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우선 군 출신의 퇴장으로 정치 소양을 갖춘 인재에 대한 정계의 수요가 늘어났다. 학자나 전문직 종사자에 비해 기자 출신은 현실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떤 자리에 앉혀도 쉽게 적응한다는 강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정치에서 점차 힘의 논리가 퇴조하고 언론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현재 추세에서 기자들의 생리를 잘 안다는 것도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언론계가 육사를 대신해 정치인들의 양성소처럼 돼가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언론계에서는 이미 ‘계보 기자’라는 얘기가 낯설지 않게 통용되는 형편이다. 낮에는 기자실에서, 밤에는 계보 사무실에서 ‘이중 생활’을 하는 기자가 많다는 것은 언론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만약 언론인들의 정계 진출이 논공행상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정치와 언론의 한계는 모호해져 버리고 말 것이다. 폭넓은 소양과 현실 감각을 갖춘 언론계 출신 인사의 정계 진출이 늘어나고 그들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반길 만한 일인 동시에 매우 경계해야 할 일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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