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李’가 뜨고 있다
  • 崔 進 기자 ()
  • 승인 1996.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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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이홍구·이수성 ‘화려한 시대’ 개막
항간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의 세대교체론을 이성계의 역성(易姓) 혁명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차기 대권 주자 반열에 오르내리는 여권 ‘주자’들 가운데는 유독 이씨가 많다. 이회창·이홍구·이수성·이한동·이인재 씨와 최근 5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이명박 의원, 그리고 야권의 이기택· 이부영 씨까지 포함하면, 가히 이씨 전성시대가 도래한 느낌이다. 고려대를 나온 이기택·이명박 씨만 제외하고 모두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이들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세 사람은 여권의 ‘3李’라 불리는 이회창·이홍구·이수성 씨다. 세 사람은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들은 현 정권 들어 차례로 총리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경기고 동기 동창인 이홍구 전 총리와 이수성 총리는 서울대 교수를 지냈다. 세 사람은 비교적 개혁 성향을 지닌 합리주의자이며, 학구적이고 참신한 이미지를 가졌다.

그러나 이들 3李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여권내 독특한 입지로 말미암아 서로 경쟁적일 수밖에 없다. 이회창씨는 강력한 차기 주자로, 이홍구씨는 유력한 당권 주자로, 이수성 총리는 잠재적 대권 주자로 권력의 중심부에 몰려 있다.

일거수일투족에 정치권의 관심이 쏠려 있는 사람은 이회창씨다. 그는 얼마전까지 집권 여당의 선거대책위 의장을 맡아 4·11 총선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견인차 구실을 한 일등공신이다. 선거 이후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이씨는 4월29일부터 각종 강연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권과 관련한 언행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참모들은 대권과 관련한 민감한 질문이 나올 때면 ‘모르겠다’는 말로 빠져나가기 일쑤다.

그의 법률사무소도 강력한 대권 주자의 지휘 본부치고는 한산하다. 50평이 넘는 넓은 사무실에는 사무장과 여직원 1명이 상근할 뿐이다. 정치 냄새를 풍기는 것이라고는 사무실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는 일간지더미와 사무장 책상에 놓인 신한국당 출입기자 명단이 고작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다.

이씨가 신한국당에 입당한 뒤로 주변에는 이런저런 인맥과 그룹이 몰려들고 있다고 전해진다. ‘잘 나가는’ 경기고 49회 동창생 25명이 회원인 청하회, 30~40대 변호사 50여 명으로 구성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경기고 법조회, 가톨릭 법조인 모임 등이 지금까지 외부에 알려진 이씨 후원 사단이다. 이밖에도 경기고와 법조계를 중심으로 하는 ‘이회창 부대’가 속속 결성되고 있다. 문제는 이들 비정치적인 집단을 얼마나 탄탄한 정치 조직으로 결집하느냐 하는 점이다.

‘DJ 대타’ 조 순 나서면 이회창 후보 유력

이씨는,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는 경선을 통해 선출하되 후보 난립은 막아야 한다는 제한경선론을 지지한다. 후보가 난립할 경우 전혀 엉뚱한 인물이 선출될 수도 있다는 논리다. 거기에는 YS의 지원 없이는 대권행 티켓을 따내기 힘들다는 이씨의 한계성이 녹아 있다.

이씨가 대권 고지에 도달하기 위해 넘어야 할 고비는 숱하게 많다. 우선 당내 지지 기반이 취약하다. 김윤환 이한동 최형우 등 당내파 주자들이 비교적 탄탄한 당내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데 비하면, 영입파인 이씨는 사막에 홀로 서 있는 꼴이다. 벌써부터 경계의 눈을 부릅뜨고 있는 당내파가 서로 손잡고 이씨를 공동의 적으로 설정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김대통령의 의중이다. 적잖은 사람이 대쪽 같은 원칙주의자인 그가 대권을 잡으면 YS의 퇴임 이후를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YS가 그를 낙점할 가능성에 회의를 나타내고 있다. 주로 민주계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다. 이씨는 89년 불법 타락 선거를 개탄하며 선거관리위원장 직을 전격 사퇴한 데 이어, 93년 감사원장 재임 시절에는 ‘성역 없는 감사’ 발언으로 주변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고, 같은해 총리로 발탁된 이후 여권 핵심부와 끊임없이 마찰을 빚다가 총리 직을 내팽개치고 나왔다. 민주계의 뇌리에는 그때의 악몽들이 생생하다.

정가 일각에서는 DJ가 대선에 출마하면 여권이 다른 주자를 물색할 가능성이 높고, DJ가 조 순 서울시장과 같은 대타를 내세울 경우 이회창 카드로 맞대응할 개연성이 크다고 예측하기도 한다. 정중동으로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하는 이씨 측근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청렴 결백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청백리론이다. 이씨는 최근 사석에서 차기 대권 후보는 모든 면에서 다른 후 보들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격우위론을 피력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언론으로부터 화려한 조명을 받는 사람은 당 대표 물망에 올라 있는 이홍구 전 총리다. 그는 5월7일 열리는 신한국당 전국위원회에서 김윤환 대표로부터 당의 지휘봉을 물려받을 가장 유력한 후임 대표감으로 꼽힌다. 사실 이씨는 총리를 그만둔 직후 전국구 상위에 거론될 때부터 YS가 ‘숨긴 무기’로 지목되어 왔다. 당내 숱한 거물들을 제치고 이씨가 당 대표 0순위로 떠오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서울대 교수와 통일 부총리·국무총리를 지낸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면서도 대권 야심이 없어 관리자형 대표로 적격이기 때문이다. 72세로 고령인 김명윤 고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참신성도 있다. 민주계 1세대인 김고문을 당 대표로 앉힐 경우 민정계의 반발에 부딪칠 수도 있다. 또한 통일 전문가인 이씨는 YS의 집권 후반기 국정 운영 흐름과도 맞아떨어지는 인물이다. YS는 후반기 국정 운영에서 남북 대화와 통일을 최대 화두로 삼을 개연성이 높다.

청와대 관계자들도 이홍구 카드가 가장 무난한 선택이라고 본다. 차기 대권 주자 가운데 한 사람을 대표로 앉힐 ‘깜짝쇼’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물론 의표를 찌르는 YS 특유의 인사 행태로 보아 의외의 인물이 전격 기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청와대의 한 고위 비서관은 어차피 당은 대통령이 직접 챙겨 나가는 만큼 당 대표는 누가 맡더라도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역대 국무총리 가운데는 후계자로 거론된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5공 때 노신영 국무총리와 6공 때 노재봉 국무총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2인자로 급히 떠올랐다가 몇달 지나지 않아 권력의 전면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이수성 총리를 둘러싼 대권 복병설은 일과성으로 그칠 것 같지 않다. 지난 4월25일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는 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단적으로 보여준 자리였다.

이 날 이총리에게는 여권내 후계 구도와 관련한 정치적 질문이 쏟아졌다. 이총리는 “대통령이 되려면 탁월한 역량과 봉사정신, 국민적 존경과 사랑을 두루 갖춰야 하는데 나는 그 어느 것도 모자란다”라며 항간의 차기 대권 주자설을 일축했다. 그는 토론회가 끝난 뒤 측근에게 “앞으로는 두번 다시 대권 얘기가 나오지 않겠지”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정가 주변에서 대권 복병설이 멈추지 않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 ‘정치적’ 정황 때문이다.

청와대 측근 “이수성 대권 가능성은 0%”

우선 임기 4년이 보장된 서울대 직선 총장을 취임 10개월 만에 차출한 YS의 의중이 여전히 의혹덩어리로 남아 있다. 이총리가 차기 복병으로 구설에 오르내리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여권이 목말라하는 TK 출신이라는 점이다. 여권 내부에서는 오래전부터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TK 세력과 손을 잡거나 TK 주자를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의 가문 또한 화려하다. 부친 이충영씨는 명판사로 이름을 날린 원로 법조인이며, 동생 이수인씨는 민주당 전국구 3번 당선자, 셋째 동생인 이수윤씨는 교원대 교수, 막내 동생 이수억씨는 SBS 국장이다.

이총리가 ‘정치 총리’로 비치는 또 다른 이유는 식당 종업원이나 엘리베이터 안내원과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고, 매일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광화문 종합청사까지 걸어서 출근할 만큼 소탈하고 대중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비서실장과 수행 비서도 기자 출신이거나 공보관 출신이다. 그는 ‘사람 관리’에 철저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측근들은 이를 소탈하고 다정다감한 천성 때문이지 결코 계산된 행동이 아니라고 말한다. 청와대 비서관들도 이총리 대권설은 실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YS의 의외성이 언제 어떤 형태로 현실화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들 3이씨가 3김 체제의 높은 벽을 허물고 화려한 이씨 전성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먼저 당내 김씨와 다른 이씨들의 도전을 물리쳐야 한다. 그 첫 시험 무대가 5월7일로 예정된 전국위원회다. 어쨌든 앞으로 정치권, 특히 여권에서 이씨 성 주자들의 발걸음이 한층 바빠질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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