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초선, 의정 출발선에서 ‘앞으로 나란히’
  • 李叔伊 기자 ()
  • 승인 1996.05.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5대 초선 위한 연찬회 성황… 실무 오리엔테이션, 이회창 등 5명 불참
지난 5월9일 국회 의사당이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15대 국회 초선 의원들을 위한 의정 연찬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의정 연찬회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과 같은 것이다. 새내기들의 의정 활동을 돕기 위해 국회의 주요 시설과 지원 조직을 안내하고, 의사 처리 절차 및 입법 활동, 의원 수당과 의원 사무실 관리 등 실질적인 부분을 설명하는 자리다. 14대 국회까지는 이러한 오리엔테이션이 각당 별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무소속 초선 의원들은 속된 말로 ‘국회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의원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해 의정연수원이 설치되면서 새로운 사업으로 국회 차원의 초선 의원 연찬회가 기획되어, 그 첫 번째 결실로 이 행사가 열렸다.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진행된 이 날 행사는 당선자들이 사인 보드에 기념 사인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국회에 이름 석자 새기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한 당선자는 사인 보드에 이름을 적어 넣으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연찬회에 참석한 의원들은 ‘초선’이라는 한마디로 묶기에는 그 면면이 너무나 다양했다. 몇십 년씩 정치에만 매달려온 ‘정치꾼’이 있는가 하면, 정치와는 담쌓고 지내다 하루아침에 선량이 된 사람도 있다. 웬만한 중진보다 낯이 익은 유명인도 있고, 선거 기간 내내 눈길을 끌지 못한 무명도 있다. 성향도 천차 만별이어서 안기부 출신인 정형근 당선자는 이를 ‘울트라 라이트(극우)에서 울트라 레프트(극좌)까지’라고 표현했다.
특히 중량급 신인들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가 불편한 듯 어색해 하기도 했다. 이홍구 신한국당 신임 대표는 같은 초선인 이완구 비서실장과 나란히 참석했다. 개회식에는 각당 원내총무가 초대되었는데, 이 때문에 신한국당 서청원 총무는 단상에, 이홍구 대표는 단 아래 자리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대표는 황낙주 국회의장의 인사말이 끝나자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이러한 어색함을 예상한 듯,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신한국당 이회창 당선자(전국구)는 아예 불참했다. 한 측근은 “선약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을 뿐, 다른 정치적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선약이라고 밝힌 이화여대 110주년 기념 음악회는 저녁 7시 이후에야 열렸다.

제각기 독특한 배경과 이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초선 의원들은 만나자마자 우선 손부터 맞잡았다. 김 덕 전 안기부장이 재야 운동가 출신인 김근태 당선자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가 하면, 민주당 이미경 당선자는 국민회의 최선영 당선자를 ‘우리 당 원혜영 의원을 물리친 대단한 파워’라며 치켜세웠다. 앵커 출신 4인방은 방송사가 아닌 국회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을 기뻐했고, 법조 출신은 법조 출신대로, 재야 출신은 재야 출신대로 반가움을 나누었다. 이 날 하루만큼은 경쟁자라기보다 험난한 과정을 뚫고 마침내 국회에 입성한 동지들이라는 ‘동아리 의식’이 앞서는 듯했다. 자리를 의식한 탓인지 정치 현안에 대한 말은 되도록 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곳곳에 각당 핵심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는가 하면, 당장 정국을 난항으로 이끌고 있는 선거 사정의 당사자들이 동료로서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의 관심은 세비와 자리 배정 방법, 보좌진 운영 등 실질적인 부분에 모아졌다.

무소속 목청 높고 선거 사정 대상자는 ‘자라목’

하지만 아무리 웃고 떠들어도 초선 의원이라는 동질감으로만 묶기에는 너무 깊은 적개심이 곳곳에 잠복해 있었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한 국민회의 당선자는 “내로라 하는 공안 검사들이 다 모였다. 이들과 동료로 일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해본 일이다. 아마 많은 마찰이 있을 것이다 ”라며, 15대 국회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했다. 신한국당 홍준표 당선자와 자민련 이건개 당선자는 악연이 악연을 낳아 끊임없이 평행선을 긋는 경우다. 슬롯 머신 사건으로 후배가 선배를 구속하는 악연을 맺은 두 사람은 자민련이 홍당선자를 선거법 위반으로 집요하게 물고늘어져 관계가 악화하고 있다. 슬롯 머신 수사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화해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눈길을 피해 감정의 골이 깊음을 짐작케 했다.

이 날 누구보다 관심을 끈 인물은 역시 무소속 당선자였다. 인지도는 낮았지만 요즘 정국에서 그들의 위상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신한국당에 입당한 김재천 당선자(경남 진주 갑)는 “여당의 개혁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입당을 결정했다. 첫 테이프를 끊는다는 부담은 있었지만 지역 여론을 충분히 감안했다”라며 자신의 입장을 적극 옹호했다. 아직 거취를 결정하지 않은 무소속들은 자신이 개발해놓은 나름의 논리를 펼치며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백승홍 당선자(대구 서 갑)는 “이제는 생활 정치를 안하면 승부 걸기가 어렵다. 지역구에서 신한국당행을 권유하는 여론이 높은데, 위천공단 문제 등 지역 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의견을 들은 후 거취를 결정하겠다”라고 말해 여당행이 멀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무소속 당선자로 등록한 임진출 당선자(경주 을)도 신한국당 입당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을 암시했다. 그는 “경주 각 직능단체와 시장상인협회 등에서 신한국당에 입당하라는 건의문을 계속 보내오고 있다. 하지만 여당 공천에서 밀려난 배신감이 가시지 않아 망설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무소속 당선자들의 목소리가 높은 반면, 선거법 위반으로 거론되고 있는 당선자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다. 혹시 이 자리가 의원으로서 마지막 자리가 아닐까 노심초사하는 가운데, 사정 정국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고대하는 눈치였다.

정작 당선자들은 정치 얘기를 삼가는 가운데, 국회 의사국장이 15대 국회의 원만한 개원을 부탁해 눈길을 모았다. 전호영 의사국장은 파행적인 국회 운영을 막기 위해 임기 개시 1주일 안에 원 구성을 하도록 14대 국회에서 법 규정을 만든 만큼, 15대 국회는 원만한 개원이 이뤄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15대 국회에서 초선 의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은 데다, 초선 중에는 당의 정책 결정에 핵심 역할을 하는 고위 당직자도 포함되어 있음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한편 장애인 변호사 출신인 국민회의 이성재 당선자(전국구)는 국회에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전무해 이동할 때 많은 불편을 겪었다. 단체 사진 촬영 때는 유난히 많은 국회 계단 때문에 다른 의원들을 한참이나 기다리게 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심하다고 불만을 터뜨린 이당선자는 국회 내부부터 장애인을 위한 공간으로 바꿔나가겠다고 말했다.

초선 의원들은 이번 연찬회에 대해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국회 사무처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백명 가운데 ‘우수’와 ‘보통’이라는 대답이 반반씩이다. 신한국당 황우여 당선자(전국구)는 실무적인 부분을 많이 배우고 사무처 직원들의 의중을 엿볼 수 있어 유익했다고 말했다. ‘예산·결산을 소홀히 하지 말라’‘법안 심사가 너무 늦다’‘외유할 때 시기나 분위기를 고려해 구설수를 피하라’는 당부는 이런 자리가 아니면 사무처 직원들로부터 들을 기회가 없는 애정 어린 충고라는 것이다. 국민회의 설 훈 당선자도 여야 의원들과 한꺼번에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몇몇 의원들은 국회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됐다며, 강제성을 띠기보다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이번 연찬회를 통해 15대 초선들만의 국회는 무난히 개원한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활약이 기대되는 본무대는 아직 개막이 불투명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