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바람에 흔들리는 청와대
  • 崔 進 기자 ()
  • 승인 1997.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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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 깊은 뜻’ 싸고 청와대 난기류… 이회창 대 이수성 편 가르기 조짐도
‘듣지도 말고 만나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 북악 기슭까지 몰아치고 있는 대권 바람을 막기 위해 최근 청와대 비서진에 내려진 3대 금기 사항이다. 사적인 이유로 대권 주자나 그 참모를 만나서는 안되고, 만약 만나더라도 두 사람 이상이 합석하되 그 내용을 반드시 보고하라는 지침이 내려졌다고 한다. 만약 이 지침을 어기고 몰래 특정 예비 주자측 사람들을 만날 경우 줄서기로 간주해 인정사정 가리지 않고 징계하겠다는 단서도 붙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청와대 비서관들은 대권의 대(大) 자만 나오면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언급하기를 회피한다. 실제로 비서관들은 대권 예비 주자 진영으로부터‘차나 한잔 하자’거나‘밥이나 먹자’는 전화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유혹이 들어와 이를 거절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권 후반기에 부는 대권 바람이 청와대라고 비켜갈 리 만무하다. 오히려 더 심한 면도 있다. 밖으로는‘듣지도 만나지도 먹지도 않겠다’고 했지만, 내부적으로는‘듣고 만나고 먹는’기류가 소리 없이, 그러나 빠른 속도로 형성되어 가고 있다. 우선 YS부터가 그렇다. 6월11일, 김대통령은 김광일 전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비장한 목소리로 당내 경선 문제를 포함해 몇 가지를 자문했다고 한다.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언질을 받았음일까. 김씨는 다음날 청와대 전·현직 비서관 5백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대통령 임기가 8개월밖에 남지 않았지만 역사는 하루아침에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라고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순간 좌중에 긴장감이 돌았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하루 만에 능히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YS 특유의 오기를 대변하는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요즘 김심과 관련해 가장 궁금한 대목은, YS가 정말 이대표에게 대권 티켓을 주려고 하는지, 아니면 이수성 고문이나 제3의 인물을 염두에 두고‘딴 생각’을 품고 있는지 하는 의문일 것이다. 흔히 김심을 움직이는 핵심 요소로 퇴임 이후 안전 문제가 거론된다.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김대통령이 퇴임 이후를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다고 장담한다. 첫째, 김대통령이‘직접’받은 돈은 한푼도 없다. 둘째, 대선 자금 공소 시효가 4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셋째, 경제가 이토록 어려운 판국에 다음 정권이 초장부터 재벌들을 잡아들여 보았자 민심만 나빠질 것이 뻔하다. 적어도 퇴임 이후 안전 문제 때문에 김심이 좌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주장이다.

“강삼재 의원을 주목하라”

그렇다면 이대표에 대한 YS의 깊은 속마음은 무엇일까. 김대통령이 정발협에 활동을 자제하라고 촉구한 것을 두고 정가에서는 김심이 이대표의 손을 들어 주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우세했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관들의 해석은 다르다. 정발협이 특정 주자에 대한 호불호를 성급하게 드러낼 경우 정발협 자체가 깨질 우려가 있는 만큼 현시점에서는 단결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만약 정발협이 이수성을 지지한다고 해보라. 그 순간 DR계와 이회창 대세론자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한 청와대 비서관의 얘기다. 그는 대통령이 정발협을 똘똘 뭉치게 한 뒤 막판에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미소만 머금은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슬쩍 ‘강총장(강삼재 의원)을 눈여겨 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김심의 창구는 이수성 고문이다. 이고문을‘가공할 잠복 카드’라고 표현하는 청와대 관계자들은 JP·이수성의 골프 회동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상대를 탐색하는 정도의 가벼운 만남이 아니라는 얘기다.“만약 신한국당이 김종필 총재를 끌어들일 경우 대선 승부는 거기에서 끝난다. 이수성은 그러한 모든 가능성을 포함해 그랜드 플랜을 구상하고 있을지 모른다.”청와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김심이 이수성 고문에게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김심과 무관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박찬종 고문이 대표 프리미엄 아홉 가지 가운데 하나로 꼽았듯이, 이대표가 자신의 입지 강화에 활용하는 최대 무기는 주례 보고다. 더구나 대표 직을 내놓아야 하느냐 마느냐 결단을 내려야 하고 당내 경선 후보 등록을 하는, 6월 말에 있을 주례 보고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 기간에 대통령은 외국에 나가 있게 된다. 김대통령으로서는 내키지 않는 주례 보고를 받지 않아도 되고, 이대표로서는 든든한 후원자가 바다 건너 멀리 도망쳐 버리는 형국이다. 청와대가 오래 전부터 이런 구도를 염두에 두고 외유 일정을 짜놓았다는 추측이나, YS가 7월21일 경선 전에 당 총재 직을 전격적으로 내놓으리라는 일부 보도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 청와대에는 대권 바람과 함께 이회창 대 반 이회창 구도라는 편 가르기 조짐이 은근히 일고 있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경우가 강인섭 정무·윤여준 공보 수석 등이 친(親)이회창계로, 박세일 사회복지·이각범 정책수석은 친이수성계로 분류되면서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머지 않아 청와대 비서실이 대폭 개편되리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김대통령이 김심을 강하게 발휘할 힘을 갖고 있느냐에 귀착된다. 청와대 고위 인사는 “대권 주자들이 대표 직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지만 대통령 말 한마디에 조용해지지 않았느냐. 김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만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정치를 해온 지도자로서 또 다른 저력을 갖고 있다”면서, 김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곧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김심은 이미 죽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김심의 생사를 놓고 고민하는 청와대에는 요즘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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