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남이가, 다시 뭉치자”
  • 崔 進 기자 ()
  • 승인 1996.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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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계, 차기 주자 각축 따라 분열 가속…내부 결속 다지기 안간힘
우르르 한꺼번에 모이면 들킬 염려가 있으니 두 그룹으로 나누어 모인다. 1차 중진 모임은 10월23일 저녁 7시로 한다. 장소는 여의도 63빌딩에 있는 중국 음식점 백리향. 소집 대상은 김명윤 최형우 김덕룡 강삼재 박관용 서청원 황낙주 황병태 등 15명. 2차 초·재선 모임은 이틀 뒤인 10월25일로 하고 장소는 역시 백리향. 대상은 박종웅 손학규 이신범 의원 등 20여 명. 국회 대정부 질의가 한창일 때 이처럼 민주계의 엔테베식 회동 작전이 철저한 보안 속에 추진되었다. 현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갖는 민주계만의 대규모 회합이다.

민주계 원로인 김명윤 고문과 서석재 의원, 강삼재 총장 등 3인이 의기 투합해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이번 민주계 회동 작전은 대다수 민주계의 찬성 속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 김영삼 대통령의 의중이 작용했는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김명윤 고문 뒤에 친척인 이원종 정무수석이 있고 이수석 뒤에 김대통령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민주계 회동이 어떤 형태로든 청와대와 교감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비밀리에 회동하려던 민주계의 계획은 막판에 이 사실이 외부에 누설됨으로써 하루 전날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모임의 좌장인 김고문은“18년 만에 국회에 들어와 감회가 새로워 옛 동지들과 식사나 하려고 했는데, 바깥에 알려지는 바람에 오해 살 여지도 있어 모임을 취소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민주계 의원들이 때와 장소를 바꿔 회합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어쨌든 민주계가 매우 미묘한 시기에, 그것도 국회가 한창일 때 남의 시선을 피해 대규모 모임을 열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민주계가 서둘러 단합대회를 갖지 않으면 안될 만큼 과거에 비해 내부 결속력이 크게 약해졌다는 점이 첫번째 이유로 꼽힌다. 민주계의 특징은 단결력이다. 위기에 처할수록 똘똘 뭉치는 상도동 특유의 응집력과 전투력은, 소수파인 민주계로 하여금 다수파인 민정계를 무너뜨릴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민주계는 YS가 청와대에 입성할 때까지 그야말로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는다는 각오로 싸웠다.

최형우계·서석재계·김덕룡계…

그러나 권력을 잡을 때까지는 공동 운명체이지만, 일단 잡고 나면 긴장이 풀리고 공신들 간에 힘겨루기가 일어나는 것이 권력의 생리다. 민주계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상도동 주변에서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며 적자 논쟁이 일더니 마침내 YS 직계·최형우계·서석재계·김덕룡계 등 여러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열 현상은 대권 정국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빨라졌다. 특히 민주계 대권 주자인 최형우 고문과 김덕룡 장관 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지는 양상을 보였다(36쪽 기사 참조). 민주계 내부에서 이대로 가다가는 민주계가 사분오열되고 대통령의 권력 누수가 가속화하므로 빨리 손을 써야 한다는 내부 자성론이 일기에 이르렀다. 민주계 회동 계획은 바로 이런 긴박한 상황 인식을 배경으로 하여 추진된 것이다.

현재 차기 대권과 관련해 민주계 내부에는 크게 두 갈래 기류가 있다. 하나는 현 정권의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YS의 법통을 이어받은 민주계 주자가 권력의 바통을 쥐어야 한다는 이른바 ‘민주계 주자론’이고, 다른 하나는 국정을 잘 이끌 사람이라면 굳이 민주계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인물 중시론’이다.

그런데 민주계 내부에는 인물 중시론을 지지하는 의원이 뜻밖에 많다. 심지어 YS 직계 인사들조차 과거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서는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온 인사가 정권을 잡아야 했지만, 앞으로는 통일이나 경제 문제가 국가적 과제인 만큼 그것을 해결할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 다음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가운데는 대인 관계가 무난한 이홍구 대표나 이수성 총리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현재 민주계 내에서는 최형우 고문이 차기 주자로 첫손에 꼽히지만, 자질론을 들어 그를 비토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다.

YS가 특정 주자를 낙점할 경우 과연 민주계가 예전처럼 일사불란하게 따라갈 것인가. 이에 대해 많은 민주계 의원이 지금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YS의 지시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청와대 비서관 출신 한 의원은 “아무리 집권 말기라고 해도 쉽사리 YS에게 등을 돌릴 수는 없다. YS에게는 거대한 정치적 힘이 있다. 그것을 거부하면 낙오병이 될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그는 민주계의 90%가 대통령의 결정을 그대로 따라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과연 그럴까.

PK 출신 한 의원은 누가 보더라도 YS의 덕으로 금배지를 단 직계 의원이다. 그런데 그의 말은 영 딴판이다. 그는 “대통령이 나를 공천한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그냥 공천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YS가 특정 인사를 대권 주자로 지명할 경우 무조건 따라가겠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민주계 내에는 YS가 특정 주자를 지원하는 것 자체를 ‘비민주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행위’라며 못마땅히 여기는 의원이 적지 않다.

지금 민주계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민주계 주자 가운데 누구를 밀어야 하느냐, 제3의 주자를 밀어야 하느냐 하는 논의는 차후 문제다. 굳게 뭉쳐야 내부 주자를 밀든지 아니면 다른 주자를 밀든지 할 수 있고, 설사 대권이 비민주계 주자에게 넘어가더라도 다음 정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지분을 요구할 수 있다. 이번 민주계 회동은 현 정권 출범 이후 세포 분열을 거쳐 온 민주계가 내부 결속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에 들어가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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