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편 도마에 오른 한승수 비서실장
  • 崔 進 기자 ()
  • 승인 1995.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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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종·홍인길·한이헌 ‘막강’…한승수 실장 유임 여부 관심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중·후반기 통치 행태에 근원적으로 궤도를 수정하기 위한 메스를 들이댈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인적 구도를 유지해 나갈 것인가. 민자당 지도체제 개편이 임박하면서 김대통령의 청와대 측근 보좌진이 다시 한번 ‘교체 도마’ 위에 올랐다. 6·27 지방 선거에서 참패한 이후 ‘암적 존재’의 집합처로까지 몰린 청와대가 과연 새로운 진용으로 재편성될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청와대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얼굴이요, 그림자라 하리만큼 핵심 요직이라는 점에서 1차적인 주목 대상이다.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인 한승수 실장의 개성은 그의 직무 수행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한실장은 있는 듯 없는 듯 소리나지 않는 정중동이 특징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부분 한실장의 업무 형태가 대통령에게 정책 방향과 대안을 적극 제시하고 비서실을 총괄 장악하는 능동형이기보다는,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비서실장이라는 개인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충실한 수동형이라는 데 공감한다.

그러나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 내에서 한실장이 너무 소극적인 보좌역에 머무르다 보니 비서실 전반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지고 그에 따른 문제점이 적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기보다는 마찰음을 피하려 하고 있다는 평도 있다.

우선 출입 기자들이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개인 한승수는 좋아하지만 공인 청와대 비서실장에게는 불만이 많다.

민자당 민정계 인사들은 한실장이 대통령에게 정세와 민심 동향 등을 정확히 보고하지 못할 뿐더러 대통령의 메신저 구실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한실장이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와 이원종 정무수석, 홍인길 총무수석과 함께 청와대내 또다른 ‘암적 존재’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실장은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직책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을 지극히 아끼는 편이다. 민감한 정치적 질문에는 묵묵부답과 원론적 설명으로 예봉을 피해나가 기자들의 원성이 잦다. 8월11일 간담회에서도 기자들은 4천억 비자금 문제와 8·15 특별 사면 등 국민적 관심사에 대해 질문을 던졌으나 한실장은 특유의 착 가라앉은 어조와 알맹이 없는 두루뭉수리 답변으로 40여 분을 때웠다. 거기에 비하면 전임 박실장은 4선 의원답게 대외 관계에서 좀더 정치적이고 동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YS는 한실장 같은 물밑 보좌 좋아한다”

상당수 청와대 비서관들은 정치권에서 한실장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높다는 사실과, 그 불만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음을 시인한다. 이들은 한실장이 정치적 힘이 떨어지고 비서실 장악력에 취약성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로 학자에다 관료 출신이라는 성분상의 한계를 든다. 한실장은 13대 때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는 했지만 본래 경제학자 출신으로 상공부장관과 주미대사를 지낸 통상문제 전문가여서 관료 쪽에 더 가깝다. 거기다 민주계 핵심들과 별다른 인맥도 없다. 이원종 정무수석이 정치 전반을 다루고 박관용 특보가 대통령을 외곽에서 보좌하는 현 청와대 구도에서 한실장의 정치 공간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한실장의 연성 스타일을 긍정 평가하기도 한다. 정무수석실의 한 고위 인사는 “비서실장의 위상과 역할은 결국 대통령이 어떤 임무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대통령은 지금 밖으로 튀지 않고 자기 영역을 조용히 고수하는 한실장 같은 물밑 보좌를 선호하는지 모른다. 직할체제를 원하는 대통령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김영수 민정수석은 “전임 박관용 실장은 야당 출신 중견 정치인이다 보니 무슨 일을 하면 톡톡 튀어 다소 진취적인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실장은 일을 많이 하면서도 성품이 조용해 일한 만큼 평가 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민주계인 이성헌 비서관은 “집권 초반 개혁 바람이 불 때는 박관용 스타일이 필요했지만 청와대 내부 체제가 어느 정도 안정된 지금은 한실장 스타일이 적격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평가는 제각각이지만 한승수 실장의 수동적 보좌 행태가 청와대 비서실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데에는 대체로 일치한다. 비서실장의 파워 기반이 취약하다 보니 비서실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지고 각 수석실은 따로 놀게 된다. 자연히 청와대는 힘 있는 실세 수석 중심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수석실은 상대적인 소외감과 무력감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청와대의 흐름을 주도하는 실세 3인방으로는 민주계이며 김대통령 측근인 이원종 정무수석과 홍인길 총무수석, 한이헌 경제수석이 꼽힌다. 소통령이라고까지 불리는 이수석과 김대통령의 인척인 홍수석 그리고 김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였던 한수석은 세모꼴인 청와대 권력 구도에서 각각 꼭지점을 형성한다. 이 세 사람은 8월23일께로 예정된 청와대 개편 때도 현 위치를 고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지난 6월 청와대 개편이 극비리에 검토됐을 당시에도 이수석과 홍수석은 일찌감치 유임이 내정됐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하다.

이수석은 많은 상도동 가신들을 제치고 정치 실세 1위로 꼽힌다. 그의 표정은 대통령의 표정으로 통할 정도이다. 그래서 기자들은 대통령을 가장 확실히 취재할 수 있는 취재원인 이수석이 유임되기를 원한다. 권력자는 누구나 자기를 대신해 희생될 방패막이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이수석은 김대통령의 요긴한 측근인 셈이다. 이수석의 거취는 매번 청와대 개편의 핵이다.

맥빠진 민정·정책·외교안보 수석실

총무수석은 비교적 한직인데도 홍인길 수석실은 그의 ‘힘’을 입증하듯 방문객들로 북적댄다. 면담 차례를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전직 대통령 4천억 비자금 문제로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한이헌 수석은 경제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제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들 3인방은 누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오든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민주계인 박관용 실장 시절 긴밀한 협조 체제가 유지됐지만 한실장 체제가 들어선 뒤로는 거의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체제로 사실상 독자 활동을 하고 있다. 민정계가 요구하는 정리 대상인 이들에 대해 대통령이 어떤 단안을 내릴지 주목된다.

6공 때만 해도 위세당당하던 민정수석실은 정무수석실에 정치 분야를 많이 넘겨주면서 다소 힘이 떨어진 느낌이다. 6·27 지방 선거 때 민정비서실은 여권에 불리하다는 내용의 비관적인 여론 동향을 올렸지만 결국 힘이 더 센 정무수석실의 낙관론이 채택됐다고 한다. 집권 초반 한창 사정 바람이 몰아칠 때 민정비서실의 문턱이 닳았지만 지금은 내방객의 발길조차 뜸해진 편이다. 김영수 수석은 민정비서실의 침체설에 대해 “민정은 문자 그대로 민심 동향을 파악해 관련 비서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기능이 약해지거나 축소된 것은 없다”고 말했지만 권력의 무게가 예전 같지 않은 듯하다.

박세일 수석이 맡고 있는 정책수석실의 사기 저하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법제도와 교육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야심만만하게 추진했던 로스쿨제도와 고교입시 개편안이 최근 사실상 백지화됐으며 그에 대한 책임소재론까지 거론되는 실정이다. 청와대 직원들조차 요즘 정책수석실의 현안이 무엇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다른 비서실의 한 고위 인사는 조광조의 예까지 들어 가며 “이상주의적 목표만 보고 달려가더니 청와대와 사법부 간에 싸움만 시켜 놓고 어느 것 하나 해낸 게 없다. 그런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며 정책수석실의 존립 근거 자체에 의문을 던졌다.

외교안보수석실은 전임 정종욱 수석과 박관용 실장이 고향 선후배이자 통일 전문가여서 힘을 발휘했으나, 정통 외교관 출신인 유종하 수석이 오면서 아무래도 청와대내 입지가 낮아진 것이 사실이라고 정부의 고위 외교 전문가는 말한다. 공보수석실도 마찬가지다. 정무장관 보좌관과 안기부장 특보를 지낸 윤여준 수석이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주돈식 문화체육부장관 후임으로 왔지만 별로 자기 할일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중론이다. 휘하 민주계의 한 비서관이 윤수석보다 힘이 더 세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다.

정치권에서는 ‘현재의 청와대로는 안된다’는 것이 지배적인 정서로 굳어지고 있는 듯하다. 김대통령의 통치 형태의 변화 여부를 가름할 수 있는 또 다른 잣대는 청와대 비서진을 현재의 민주계 중심 구도로 가느냐, 아니면 옛 관료를 다수 수혈하는 민정계 주도 체제로 짜느냐에 있다. 그것은 김대통령의 정국 구상과 함께 후3김 시대에 대한 대비 체제를 예고하는 풍향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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