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풍 3인조 뒤에 경기고 3총사 있다
  • 崔 進 기자 ()
  • 승인 1998.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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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회 졸업생 ‘비선 조직’ 이회성·이수영·이석희 맹활약…오정은·조 청래는 ‘청와대 라인’
판문점 총격 요청과 국세청 대선 자금 모금 사건과 관련해 97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 진영을 극비리에 지원한 비선(秘線)에는 이른바 총풍 3인조 외에 경기고 60회 트리오라는 또 다른 3인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회창 후보 진영과 직통 채널을 유지하면서 막후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진 경기고 60회 3인조는 이후보의 동생 이회성씨와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 이수영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세 사람이었다고 구 여권 핵심 인사는 밝혔다.

문민 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비서실에서 근무했던 한 핵심 인사는 “청와대는 지난 대선 때 이 세 사람이 자주 만나 술을 함께 마시면서 이회창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어 온 이들은 끈끈한 학연을 바탕으로 허물 없이 지냈는데, 특히 97년 대선 막바지에는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발벗고 나섰다고 한다.

3총사+서상목, 청와대·당·자금 분담해 맡아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역할을 분담해, 회성씨는 총괄 책임자이자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직통 창구로, 이수영씨는 청와대내 이회창 지지파 리더로, 이석희씨는 대선 자금 모금책으로 각각 뛰었다는 것이다. 이석희씨에게 이후보의 대선 자금 모금을 요청했다는 서상목 한나라당 의원은 이회성-이석희-이수영 3인조의 고교 1년 후배인 경기고 61회이다. 경기고 동기 동창 3명과 후배 1명이 똘똘 뭉쳐 경기고 선배인 이회창 후보의 지근 거리에 포진하면서, 이후보(이회성), 재계(이석희), 청와대(이수영), 당(서상목)을 각각 밀착 마크한 셈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인물이 이수영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이다. 아직은 언론의 관심권에서 비켜나 있지만 그는 지난 대선 때 보이지 않게 이후보 진영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씨는 YS가 중립을 선언했는데도 청와대에서 이회창 대세론을 전파하고 이후보의 대선 전략을 수립하는 데 남몰래 기여했다고 당시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은 주장했다.

정권 말기의 ‘김심’은 한마디로 갈팡질팡이었다. 맨 처음 이수성 쪽으로 가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이인제 쪽으로 가는가 싶더니 다시 이회창 쪽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는 등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자연히 청와대 참모들은 겉으로는 중립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각자 다른 길을 갔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서 이회창 후보를 위해 청와대에서 치밀하게 움직인 사람이 바로 이수영씨였다는 것이다. 당시 민정비서실에서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이씨는 정세 판단력과 전략적 마인드가 뛰어났으며, 민정비서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들을 활용해 대선 과정에서 소리 없이 맹활약한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물론 이씨가 청와대에서 혼자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총풍의 장본인으로 지목되는 오정은씨도 바로 이씨 밑에서 일했다. 오씨와 청와대 민정비서실에서 함께 일했던 관계자들은 오씨가 대선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이회창 후보를 위해 내놓고 뛰었다고 회상했다. 예컨대 중립을 지키라는 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후보 진영에 전화로 정보를 전해 주거나 전략을 설명해 주다가 동료들로부터 “너무 노골적이지 않느냐. 돕더라도 소리 없이 도와라”라고 핀잔을 들은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한다.
오씨는 부산고와 연세대 법대를 나와 프랑스에서 10여 년간 유학하고 귀국한 뒤, 93년 외삼촌인 박관용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추천으로 민정비서실에 들어갔다. 활달하고 비교적 다변이었던 그는 주로 북한 문제를 다루었지만 점차 정치 분야에 깊숙이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오씨는 과연 엄청난 총풍을 모의하고 이회창 후보에게 대선 전략을 제안할 만큼 비중 있고 뛰어난 인물인가. 이 물음은 이회창 총재와 총풍의 관계를 짚어볼 수 있는 실마리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에 대해 이회창 총재와 박관용 의원은 오씨를 ‘일개 행정관’이라고 치부하며 “잔재주는 부릴지 모르나 대선 전략을 논의할 만한 위인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씨가 열다섯 차례에 걸쳐 이회창 후보에게 전달했다는 대선 관련 문건을 들여다보면,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인 것 같다는 것이 문건을 본 사람들의 중론이다. 특히 오씨가 문건에서 이수성·이인제·박찬종 씨를 어떻게든 끌어안아야 한다면서 제시한 방안은 매우 구체적이고 전략적이어서 보는 이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문건에서 오씨가 가장 강조한 대목은 이후보의 이미지 전략이었다. 예를 들어 ‘전경련을 방문할 경우 토론할 의제를 사전에 통보하고, 토론 때는 넥타이를 풀고 셔츠 차림으로 밤늦게까지 진행함으로써 경제를 걱정하는 이후보의 지도자적 스타일이 배어나오도록 한다’‘장애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점자 명함을 만들어 적절한 기회에 자연스럽게 내보인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오씨는 또 이후보에게 ‘당당한 모습이 오히려 오만하고 독선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지난번 후보 토론회에서 셔츠의 옷깃이 너무 올라가 목이 보이지 않는 등 딱딱한 모범생 이미지를 풍겼다’는 등 이후보에게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오씨는 이후보 부인 한인옥 여사에 대해서도 ‘조 순 총재의 부인과 함께 김장 담그는 모습이 보도되어 넉넉하고 자연스러움이 한껏 부각되었으므로 조 순 총재 부인의 조연 역할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세심하게 조언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반드시 김대중 후보 관련 정보를 첨가하는 친절함을 보였다.

그렇다면 당시 오씨의 위치는 어떠했는가.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역대 정권과 달리 ‘행정관의 전성 시대’라고 하리만큼 30∼40대 젊은 행정관들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청와대 곳곳에 포진한 현철씨 인맥은 30대 행정관이 상급자인 비서관을 능가하는 중책을 비공개로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씨 역시 93년 처음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외삼촌이 대통령 비서실장이었고, 97년 대선 때도 외삼촌이 이후보 진영을 도운 데다 이후보 진영과 깊숙이 선이 닿아 있었으니 종횡 무진했을 법하다.
오씨와 함께 이번 사건의 또 다른 혐의자로 지목되는 사람은 조청래 전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 현철씨 인맥이었던 그는 이수영 전 비서관 휘하에서 오씨 등과 함께 이후보를 위해 뛰었다. 서울지검 공안1부는 10월10일 조씨 등 3명을 ‘조용히’소환 조사한 것으로 알려져 그 결과가 주목된다. 결국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청와대 라인은 이회성­이수영­오정은­조청래 등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수영·오정은·조청래, DJ 청와대에서 근무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수수께끼는, 97년 대선 때 그토록 이회창 후보를 위해 뛰었던 이수영 전 민정비서관과 오정은·조청래 전 행정관이 어떻게 정권이 바뀐 뒤에도 계속 청와대에서 근무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수영씨는 김대중 정권에서 한 단계 더 뛰어 비서실장 직속의 상황실장이라는 중책을 맡았고, 오씨와 조씨 역시 청와대에 계속 남아 있었다. 청와대가 대통령의 참모 집단이라는 원론적인 개념으로 생각해 보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의 처세술이 상상을 초월하거나 새 정권 내부의 실력자가 밀어 주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고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다. DJ의 청와대에 잔류해 있는 이회창 인맥을 청산하라고 요구했던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이들을 퇴출시키라고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청와대 안팎의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버티던 이들은 지난 6월에야 그만두었는데, 이수영씨는 정부 산하 단체로 옮겨갔다.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의 전모는 과연 밝혀질까. 오씨 등 당사자는 10월9일 구속적부심에서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한 반면, 검찰과 안기부는 ‘자신 있다’고 장담한다. 게다가 한나라당은 10월10일 김중권 비서실장과 총풍 3인조 가운데 한 사람인 한성기씨가 연계되어 있다고 새롭게 주장하고 나서 상황은 더욱 꼬여 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총풍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97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비선, 특히 경기고 인맥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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