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중임제' 물밑 저울질 한창
  • 김종민 기자(jm@e-sisa.co.kr) ()
  • 승인 2000.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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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상반기쯤 ‘개헌 멍석’ 깔릴 듯… 총대 멜 선수 없어 문제
지난해 여름 DJ와 JP가 대선 공약인 내각제 개헌을 유보한다고 합의하면서 수면 아래로 잠복했던 개헌 문제가 대통령 중임제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등장했다. 지난 7월11일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민주당 문희상·송석찬 의원, 한나라당 김덕룡·손학규 의원은 마치 입을 맞춘 듯 개헌 문제를 제기했다. 비록 청와대와 이회창 총재측이 조기 진압에 나서 ‘반짝 이슈’가 되기는 했지만, 개헌 문제는 이미 정치권의 중심부에 진입한 듯한 느낌이다. 최근 <시사저널>이 16대 의원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3분의 2에 달하는 의원들이 개헌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뒷받침하고 있다(<시사저널> 제560호 참조).

개헌 문제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권력 구조 형태인데, 현재로서는 대통령 중임제가 주된 검토 대상이다. 아직 DJ와 JP가 내각제 개헌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도 개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원 가운데 96.8%가 대통령 중임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대통령 중임제가 대세이기는 하지만 각 정치 세력의 이해 관계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아직 DJ의 의중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여권에서는 대통령 중임제와 정·부통령제 동시 도입을 원하는 이가 많다. 이인제 민주당 고문은 그동안 줄기차게 대통령 중임제와 정·부통령제를 주장해 왔다. 노무현 지도위원도 “지금 개헌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이 적절하지는 않지만 때가 되면 대통령 중임제와 정·부통령제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혀 방향은 어느 정도 잡고 있음을 내비쳤다. 본인은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화갑 의원의 의중도 관심사이다. 이번에 개헌 문제를 제기한 문희상 의원이 한의원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어, 문의원의 소신이 한의원의 의중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여권에서 대통령 중임제와 정·부통령제 도입을 선호하는 이유에는 조기 레임 덕 방지, 지역 감정 해소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요인은 정권 재창출에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부통령제 방안은 여권의 처지에서, 영남권 후보와 연합해 한나라당의 영남 기반을 최대한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매력이 있다.

당연히 이회창 총재측은 정·부통령제 도입을 반대한다. 대통령 중임제는 고려해 볼 만하지만 정·부통령제는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과 같이 정치가 안정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정·부통령제가 합리적으로 운용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세력 간의 명분 없는 타협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아 정치 불안정을 깊게 하리라는 것이다. 이총재측은 지난 대선에서의 DJP 연합을 그 예로 들었다. 서로 정책이 다른 세력이 집권만을 위해 손을 잡았기 때문에집권에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 국정 혼란이 심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총재측이 정·부통령제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득실 면에서도 한나라당에 유리할 것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정·부통령 구도로 야권이 호남이나 충청, 혹은 수도권에서 표를 끌어오는 것보다 여권이 영남 주자와 연합해 영남표를 분산시키는 폭이 더 클 것이라는 계산이다.
이회창, 정·부통령제 꺼리는 까닭

더욱 큰 문제는 만일 정·부통령제가 도입되면 어렵게 묶어 놓은 한나라당 대열이 적지 않게 흔들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선착의 효’를 누리고 있는 이총재측으로서는 가능한 한 불확실한 변수를 없애는 것이 차기 집권에 유리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차기 대선에 공개 개입하겠다고 한 YS 역시 어떠한 종류의 개헌에도 비판적이며, 현재의 5년 단임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총재측과는 맥락이 다르지만 여권이 힘을 쓸 수 있는 여지를 최대한 좁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개헌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공론화할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여야 어느 쪽도 이 문제를 먼저 제기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에서는 먼저 얘기를 꺼내면 자칫 정권 재창출을 위한 정략으로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권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굳이 자청해서 멍석을 깔아 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총재측은 개헌 여부와 관계없이 개헌 논의 자체가 김덕룡·박근혜·손학규 의원 등 비주류 인사들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주어 한나라당이라는 거대 야당의 내부 분열을 자극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일정을 감안할 때 내년 상반기에는 개헌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인제·김덕룡·손학규 의원 등이 개헌 문제를 공개 거론했듯이, 개헌 문제에 이해 관계가 밀접한 여야의 차기 주자들이 적절한 시점에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울러 앞으로 예상되는 남북 관계 변화가 개헌 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릴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최근 알려진 대로 북한이 노동당 규약을 개정하게 되면 헌법 제3조의 영토 조항 개정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권력 구조 문제도 동시에 다룰 수밖에 없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개헌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아직 많지 않다. 여야 힘의 균형이 팽팽하기 때문에 합의 개헌이 불가피한데, 차기 대권에 직접 영향을 미칠 개헌 문제에서 여야가 교집합을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헌 가능성은 높지 않다. 목숨을 걸고 개헌을 추진하는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여야 정치 세력 가운데 어느 쪽도 그 정도 결의가 있는 세력은 없기 때문이다.” 개헌론자인 문희상 의원의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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