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제2차 내전' 일어날까
  • 안철흥 기자(epigon@e-sisa.co.kr) ()
  • 승인 2000.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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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갑, 홀로 서기 시작… 권노갑, 경계 태세 돌입
“나를 동교동계 후보로 보지 마라. 스스로 출마를 결심했고, 독립적인 정치인으로서 경선에 참여하는 것이다.” 민주당 한화갑 의원은 7월14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한 권노갑 고문을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추대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아직 생각해본 적 없다. 권고문측으로부터 제안받은 적도 없다”라고 말했다.

한의원은 총선 전 자신이 한 말로 언론에 보도되었던 ‘차기 주자는 비호남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도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라고 반박했다. 누군가가 차기 경선에 나설 것이냐고 묻기에 호남 출신인데 되겠느냐고 한 것이 호남 출신은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킹이든 킹메이커든 지금 거론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외줄타기 승부수 던진 한화갑

한화갑 의원이 외줄타기 승부사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는 최근 언론과의 접촉을 재개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로 날이 서 있다는 느낌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금역을 넘나든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넘어야 할 선과 넘어서는 안될 선이 교묘하게 교직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동교동계 후보가 아니다’라는 말 뒤에는 ‘자유로운 경선 주자’라는 말이 붙고, ‘비호남 후보론을 말한 적이 없다’는 말 뒤에는 ‘지금 차기를 거론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붙는 식이다. 서로 모순된 듯한 말을 섞어 쓰는 그의 뜻은 자명하다. 권노갑 고문과는 확실한 선을 긋되, 그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의중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시위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의 홀로 서기 목표가 무엇인지 확연해진다.

한의원의 이런 움직임은 ‘권·한 내전’의 전적이 일단 유리하게 나왔다는 자신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권고문이 출마 선언을 하고, ‘양갑+이인제 연대’ 가능성이 거론될 때만 해도 그의 홀로 서기 시도는 좌절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DJ가 권고문의 경선 출마를 주저앉히면서부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한의원의 한 측근이 “DJ를 움직인 것은 여론의 힘이었다”라고 말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한의원이 여론을 무기로 삼기로 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권고문의 출마 선언은 민주당 안에서 권고문에게 힘이 급속하게 쏠리는 현상을 불렀고, 이는 곧바로 불공정 경선 논란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권고문 체제로는 더 이상 민주당을 이끌 수 없다는 여론을 DJ가 받아들인 것 아니냐는 것이 한의원측의 해석이다.

뿐만 아니라 권고문이 불출마를 선언한 이후 DJ는 민주당 의원 전원을 청와대로 부른 자리에서 “이번 전당대회는 당권이나 대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못박았다. 이런 DJ의 한계 설정이 한의원에게는 역으로 보폭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준 측면이 있다. 이 두 가지 상황 전개가 한의원으로 하여금 홀로 서기를 다시 한번 시도하게 만든 동력을 제공한 셈이다.

한의원은 앞으로 목소리를 차츰 높여갈 계획이다. 한의원의 약진은 곧바로 권고문 몰락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동교동 서열에서 장자와 둘째라는 명확한 위계 질서 안에 놓여 있으면서도 동교동의 후계 구도를 놓고서는 경쟁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따라서 한의원의 독자 행보에 속도가 붙을수록 두 사람의 ‘휴전’ 상태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한의원이 홀로 서기를 다시 시도하자 동교동계가 긴장 상태에 돌입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와 관련해 불출마 선언 이후 권노갑 고문의 행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권고문은 7월12일 문희상 의원이 주도하는 ‘팍스 코리아나 21’ 모임에서 정치 인생 처음으로 대중 강연을 했다. 그가 이 날 강연에서 말한 요지는 세 갈래로 압축된다. 첫째, 동교동계는 나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고 있다. 둘째, 이번 전당대회는 당권이나 대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셋째, 전당대회에서 이인제 고문을 밀 생각이 없으며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겠다.

권고문은 불출마 선언 직후 그 득실을 면밀히 따지면서 향후 행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측근들과 숙의를 거듭했다. 대중 강연에서 밝힌 세 가지가 바로 그 결론인 셈이다.

이 중 권고문이 가장 강조한 대목이 동교동계가 자기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고 말한 부분.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권고문이 ‘나를 중심으로’라는 말을 강조한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좌장으로서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 말이 한의원을 겨냥한 것임은 물론이다.

첫 번째 화두가 한의원을 향한 메시지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당내용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정권 후반기의 원활한 국정 운영과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해 권고문이 일선에 나서서 조율자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권고문의 한 측근은 최고위원회가 당헌상의 협의기구일 뿐이라고 말했다. 권고문이 최고위원을 맡고 안 맡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권고문은 그런 위상을 바탕으로 하여 자유 경선의 열기는 열어두되, 자칫 경선 열기가 당내 민주화 열기를 업고 레임 덕 현상으로 비화하는 것은 막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인제 고문에 대한 권고문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권고문의 최측근 의원은 “총선 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권고문이 이인제 고문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은 당내 차기 주자 관리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 말이 권고문이 이인제 고문을 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권고문의 최측근 의원은 권고문이 여전히 이고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권고문측이 이고문에게 경선 출마보다는 지명직 최고위원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을 권유하는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물론 이것도 이고문의 성장을 제어하기보다는 이고문을 배려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고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해석했다.

아울러 권고문은 한의원에게 김옥두 총장을 보내 ‘아랫 사람 관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한의원에게 몸을 뺄 명분을 만들어 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해두겠다는 표현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한의원은 홀로 서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고, 두 사람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 한의원의 측근은 “권고문 문제는 더 이상 우리의 의제가 아니다. 권고문은 스스로 자기 혁신을 해야 한다”라고 말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지명직 최고위원 5명으로 늘리는 이유

물론 정권을 재창출해야 한다는 점에는 두 사람 간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 방법과 대상에서는 갈라진다. 권고문이 치밀한 조율을 거쳐 차기 후보를 정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한의원은 자유 방임 식의 당내 경선을 선호한다. 한 측근은 이에 대해 “한의원은 무릇 모든 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권고문이 이인제 고문에게 계속 ‘애정’을 드러내고 한의원이 이에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더구나 권고문은 한의원이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본다. 권고문 진영이 지명직 최고위원 숫자를 3명에서 5명으로 늘려서 권고문의 몫을 확보해야 한다는 방안을 생각하는 것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한의원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권고문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2년은 차기 후보가 드러날 수 있는 기간이고, 킹 메이커 역할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러나 한화갑 의원은 아직 대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에게 DJ는 멀리 있고 한의원은 가까이 있다. 한의원에게 힘이 쏠린다면 한의원이 DJ를 받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게 바로 레임 덕이다. 권고문은 그것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한의원 생각은 다르다. 한 측근은 “킹은 만들어질 수도 없고, 만든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킹 메이커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끝까지 킹이 되려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인위적인 킹 메이커 역할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다른 측근은 “바둑을 둘 때는 항상 최선의 수를 둬야 한다. 최선을 다해 둔 돌이 요석이 될지 사석이 될지는 중반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차기 후보 가시화 과정도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의원이 보는 레임 덕도 권고문과는 전혀 다르다. 한의원은 “당이 관료화하고 있다는 점이 당의 위기를 불러오고, 그것이 계속되면 레임 덕이 발생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한의원은 당의 활성화만이 레임 덕을 방지하고, 집권 후반기의 국정 운영을 원활하게 뒷받침할 수 있다고 본다. 한의원의 측근은 “한의원이 홀로 서기를 시도하고 전당대회를 당 활성화 계기로 삼겠다고 생각하는 이면에는 당의 관료화를 깨겠다는 복안이 깔려 있다”라고 말했다.

한화갑 의원은 주사위를 던졌다. 한의원은 홀로 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문제는 권·한 두 진영 모두 DJ의 의중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종속 변수’라는 점이다. 그러나 DJ 또한 두 사람 사이의 문제에 관한 한 섣불리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없다는 점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이렇게 전망했다. “권고문은 DJ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DJ와 정치 생명을 같이할 사람이다. 때문에 DJ가 권고문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DJ는 한의원이 앞으로 동교동의 계보 관리를 맡을 유일한 사람임도 알고 있다. DJ로서도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의 손을 들기가 참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의원의 홀로 서기 성패는 DJ의 의중보다는 누가 여론을 얻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한 말이다. 한의원은 그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고 믿고 있다. 동교동 개혁을 외치는 한의원의 홀로 서기가 성공할 것인지, 아니면 권고문의 견제구가 위력을 발휘할지는 DJ의 의중과 여론의 추이에 따라 판가름 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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