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천정배는 뛰고 신기남은 헤매고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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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원내대표·의장, 대조적 행보로 평가 갈려
열린우리당이 7월 들어 친일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을 비롯해 국보법 폐지, 사형제 폐지, 공직자 재산형성과정 공개 같은 갖가지 개혁 입법안을 들고 나오자 세간에서는 곧바로 ‘정치적 꼼수’라는 평이 나왔다. 신기남·천정배 체제 출범 이후 20%대까지 떨어진 당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고정 지지층이 좋아할 만한 개혁 법안들을 우후죽순 격으로 들고 나온 것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이와 함께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걱정인 마당에 여권의 개혁 입법이 지지층 결집에 얼마나 효과적이겠느냐는 부정적 전망도 뒤따랐다.

하지만 이런 비판과 냉소는 천정배 원내대표의 7월16일 기자회견을 계기로 상당 부분 완화되는 분위기다. 천대표가 하한 정국의 핵심 화두를 ‘민생 국회’로 치고 나오면서 개혁과 민생 살리기라는 양 날개를 폈기 때문이다. 천대표는 개원 국회를 평가하는 자리에서 ‘하한 정국에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여름 휴가를 반납하고 모두 민생 현장에 뛰어들 예정’이라고 말했는가 하면, 일요일인 7월18일에도 기자 간담회를 열어 “우리의 최대 과제는 경제와 민생 살리기다. 7월19일부터 1주일 동안은 상임위 별로 민생 현장을 방문해 9월 정기국회를 착실하게 준비하도록 하고, 7월26일부터 1주일은 경영자단체, 양대 노총, 시민단체 등 각 경영 주체들과 집중적으로 만나 경제 회복 방안을 논의하겠다”라고 구체적인 일정표까지 제시했다.

이처럼 천대표가 개혁 입법과 민생 살리기를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여권에서는 천대표가 이제야 감을 잡은 모양이라는 안도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는 지난 5월 새 원내대표로 선출된 후 신기남 의장과 함께 여권 혼선의 쌍두마차로 비판을 받아온 터였다.

천대표, ‘민생 살리기’ 카드 꺼내 이미지 쇄신

여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천대표가 대오각성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한나라당 박창달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부결 사태를 겪으면서다. 천대표는 원내대표 취임 후 김근태 전 원내대표가 마련해 놓은 개혁 국회 청사진은 뒷전으로 제쳐두고 원내 곳곳에 자기 사람을 심는 등 배타적인 면모를 선보였다.

천대표는 원내 운용과 관련해서도 원내 기획실이나 행정실 직원들의 조언을 묵살하고 자기 뜻을 고집하는 일이 빈번했다. 박창달 의원 건만 해도 당시 원내 보좌진은 ‘당론을 정해야 한다’ ‘의원총회 분위기를 체포동의안 찬성 쪽으로 유도하도록 사전 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천대표는 ‘자유 토론’을 강행했다. 그 결과 첫 번째 발언자로 나선 유인태 의원의 ‘검찰 공화국’ 발언, 참여정부 들어 검찰 수사를 받은 염동연 의원의 검찰 비판 발언 등이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결국 여론의 뭇매를 맞은 체포동의안 부결을 낳은 것이다.

박창달 의원 체포동의안이 부결되던 6월29일 저녁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천대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책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는 원내 운영을 대표 중심에서 시스템 중심 쪽으로 선회했다. 정동영 전 의장의 비서실장을 지내 ‘정동영 사람’으로 분류되던 김영춘 의원을 제2 수석 부대표로 선임해 과부하가 걸린 이종걸 수석 부대표의 역할을 분담토록 한 것 등이 대표 사례다.

한달 전부터 가동되고 있는 CUG(Closed Users Group:PC 통신에서 특정 사용자만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든 그룹)도 원내 의사 소통을 원활히 하는 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원내 비서실·기획실·행정실·정책실 실장은 매일 아침 회의를 열어 현안을 점검하고 CUG를 통해 각 부처에서 생산되는 문건을 공유한다. 국회의원들 역시 의원들만 접속할 수 있는 CUG를 통해 누가 어떤 법안들을 추진하고 있는지, 국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이 하나 둘 갖춰지면서 중구난방으로 돌아가던 원내가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한 원내 인사는 “민생 국회에 전념하자는 화두도 이런 내부 토론 과정을 통해 나왔다. 천대표도 과거와 달리 자기 소신을 회의체를 통해 관철하는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천정배 대표가 개혁에다 민생까지 선점하면서 신기남 당 의장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는 분위기다. 당의 한 고위 인사는 “천대표는 감을 잡았는데, 신의장은 여전히 헤매고 있는 것 같다”라고 꼬집었다. 신의장이 한·미 동맹을 강조한다며 “제 부친도 빨치산 토벌대장을 지냈다”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이나, MBC 라디오에 출연해 “인구 비례로 보면 우리 나라의 이라크 파병 규모가 감내할 만한 수준이라고 본다”는 식의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 고위 당직자는 지금 열린우리당의 최대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당에 발길을 끊은 것이라면서,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신의장의 리더십 부재를 들었다. “신의장은 세상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없는 것 같다. 아침 회의에 나올 때 생각 없이 참석하는 때가 많고, 정리된 자료를 보고 얘기하다가도 샛길로 빠지곤 해 참석자들을 곤혹스럽게 한다”라는 것이다. 방미 후일담을 사흘씩이나 아침 회의의 ‘오프닝 멘트’로 써 먹는 것을 보며 당 지도부조차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이 인사는 “지금 여권에는 청와대·내각·원내만 있고, 당은 없다는 게 중론이다”라고 여권의 정서를 대변했다.

하지만 이런 당 안팎의 불만에 대해 정작 신의장측은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굳이 신의장만의 독자 상품을 개발하는 것보다 여당 대표로서 그때그때 필요한 역할을 수행할 생각이고, 지금은 한·미 동맹을 확고히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신의장의 한 측근은 “신의장도 한·미 동맹을 강조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라는 것을 안다. 귀국 비행기에서 ‘돌아가면 욕먹는 일만 남았지?’라고 했을 정도지만,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다 역사와 대중이 평가해주리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 역시 신의장 방미 중에 이미 라이스 미국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이 내한해 더 확실한 방법으로 한·미 동맹을 확인하고 간 터여서, 신의장의 행보는 대중의 폭 넓은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지단(프랑스 축구선수)의 리더십을 거론하며 팀플레이가 살아나는 당을 만들겠다고 강조하는 신의장이 성큼 앞서 가는 천정배 원내대표와 어떤 관계를 설정하며 당내 입지를 회복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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