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장학회는 ‘정치적’ 장물이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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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강탈한 부일장학회가 ‘뿌리’…박근혜 이사장 취임 뒤 ‘박정희 색깔’ 짙어져
“잘못된 것이 있어야 사퇴하는 것 아닌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7월26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수장학회 이사장 직을 사퇴할 생각은?”이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박대표는 1995년부터 부산일보 지분 100%와 문화방송 지분 30%를 갖고 있는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러나 박대표의 이같은 입장이 유지될 수 있을지는 두고보아야 한다.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문화방송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강제로 빼앗긴 고 김지태씨의 유족이 처음으로 <시사저널>을 통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등 논란이 달아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유족은 정수장학회가 탄생한 진상을 밝히고 박대표가 이사장 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 이름을 부일장학회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본격적인 논란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박정희의 ‘정(正)’자와 육영수의 ‘수(修)’를 따서 만들었다는 정수장학회가 탄생한 것은 1982년 1월14일. 그러나 정수장학회는 1962년 7월17일 창립된 5·16 장학회가 이름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5·16 광장이 여의도 광장으로 바뀐 것처럼,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추진했던 ‘박정희 지우기’의 일환으로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쿠데타 자금 지원 안해 보복당했다?

그러나 5·16 장학회의 전신, 즉 정수장학회의 뿌리가 부일장학회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일장학회는 고 김지태씨가 1958년 11월 설립했다. 김씨는 한국생사·조선견직·(주)삼화를 창업했고, 부산상공회의소 1~3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부산일보사와 부산문화방송·한국문화방송을 설립한 부산 경제계의 거물이었다. 그는 정계에도 진출해 2·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부일장학회가 5·16 장학회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 과정은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다. 1961년 3월, 2군 부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쿠데타를 꿈꾸던 박정희는 당시 부산일보 주필이던 대구사범 동창생 황용주씨를 만나 ‘거사 자금’을 요청했다. 당시 부산일보 사장이던 김지태씨에게 말해 혁명 자금 오백만환을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김씨와 그럭저럭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황씨는 김씨에게 박정희의 부탁을 전하지 않았다(유족은 황씨가 김씨의 성격이 강직하고 곽상훈·박순천 등 당시 민주당 핵심 인사들과 남다른 친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실리도 얻지 못하고 정보만 누설할 것을 염려해서 말을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박정희는 급기야 김씨를 만나기 위해 부산일보 사장실까지 찾아갔으나, 김씨가 ‘실수로’ 사무실을 그냥 나가버리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거사를 앞두고 자금 염출에 여념이 없던 박정희가 김씨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4·19 이후 발표된 부정축재자 명단에 없던 김씨는(오히려 당시 민주당 정권은 김씨에게 상공부장관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5·16 이후 부정축재자로 몰려 추징금 5억4천5백70만환을 내야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1962년 4월, 그는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로 끌려갔다.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켰고, 농지개혁법과 관세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김씨의 아내 송혜영씨 또한 관세법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김씨는 이에 대해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결백했기 때문에 끝까지 맞설 결심이었다. 그러나 산하 기업체 간부들이 희생당하고 있는 데다가 기업 경영이 엉망이 될 것이 걱정되어 협상에 응했다. 당국자들은 번갈아 나를 압박했고, 작성해온 각종 양도서를 내밀고 강제로 날인하게 하였다.”

1962년 5월26일 김씨는 민주당 정부에서 법무부장관을 지낸 고원증씨가 가져온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의 주식 100% 그리고 부일장학회 운영권과 부산 서면 일대의 토지 10만평을 포기한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 5일 뒤인 6월1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5·16 장학회는 7월14일 초대 이사장에 이관구, 감사에 김씨로부터 포기 각서를 받았던 고원증씨를 선임했다.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김씨와 주변 인사들이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1년 8월7일 김씨는 자필로 쓴 양도경위서를 5·16 장학회에 보냈다.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을 매각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제3자에게 팔아서는 안되고 팔게 되면 본인이 사겠다고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경위서 가운데 ‘날인을 강요당하고, 쇠고랑을 찬 손으로 본의 아닌 날인을 하게 되었음’ ‘(1962년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이었던 박용기로부터 ‘조종한 인간들에게 휩쓸려 저질렀다’라는 사과 서신을 1963년에 받고 참 억울하였으나, 본인은 시종일관 침묵을 지켜왔다’라고 쓴 대목이다. 부산일보와 부일장학회 등을 강탈당한 그가 나름으로 박정희 정권에게 강력하게 항변한 것이다.
유족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당시 여러 사람이 박대통령에게 5·16 장학회를 김씨에게 돌려주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민주당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의장까지 지낸 곽상훈씨가 어느 날 김씨에게 전했다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곽상훈씨가) 돌려줘야 하지 않느냐고 얘기했더니 박대통령이 화를 내더라.” 박대통령은 역시 민주당 의원이었던 박순천씨에게도 “돌려줄 생각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1960년대 후반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지낸 추인석씨는 “1982년 가을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낸 김택수씨를 만났는데, 박대통령이 그에게 ‘부산일보를 민간인에게 양도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줄 수 없고 원래 주인한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고 했다”라고 증언한다. 김지태씨의 장남 영구씨도 “김종필씨가 국무총리였을 때 그가 ‘미안하게 됐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돌려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박대통령은 한때 부일장학회 등 ‘정치적 장물’들(유족의 표현)을 김씨에게 돌려줄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왜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까. 김씨의 큰아들 영구씨는 그 이유를 정치적인 데서 찾았다. “1971년 대선 당시 부산 유세에서 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5·16 장학회 문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만약 돌려준다면 박대통령으로서는 자기가 잘못했고 김후보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가 돌려주고 싶어도 이 일 때문에 돌려주기가 더 어려워졌을 것이라고 본다.”

1988년 10월에는 부산 출신 국회의원 13명이 ‘부산일보사 등의 소유권 원상회복’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는 “정수장학회가 갖고 있는 부산일보 주식을 전면 공개해 부산 시민에 의한, 부산 시민을 위한 신문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인 1993년 3월 유족이 ‘선친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며 청와대에 낸 탄원서에 대해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10년 동안 이 문제는 잊혔다.

반면 1995년 박근혜 대표가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박정희 색깔’이 더 짙어졌다. 정수장학회 8대 이사장인 박대표는 1999년과 2003년 연임되었는데, 임기는 2007년 5월까지다. 박대표는 지금도 한 달에 두 번 정도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11층에 있는 정수장학회 사무실에 들러 업무 보고를 받는다.

정수장학회 이창원 이사는 “공익 재단으로서 장학금을 주기 위해 노력할 뿐 보도나 정치에 영향을 행사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기금은 2백억원 정도이고, 올해 문화방송으로부터 20억원, 부산일보로부터 8억원을 출연받아 장학금을 주고 있다. 1962년부터 현재까지 3만2천여 명이 장학금을 받았다”라고 밝혔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갈수록 박대표에게 고민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아버지의 부정적인 유산을 발전적으로 극복하겠다고 선언한 만큼 이 문제의 처리 여부가 그녀의 언행일치 여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은 물론 정치적인 장래와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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