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1김'도 국내 정치에 가세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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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답방, 정국에 큰 영향 끼칠 듯…
야당 '통일세력 결집→정계 개편'에 촉각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남한 정치의 상수(常數)로 등장하고 있다. DJ·YS·JP 3김에 김위원장이 가세해 이른바 4김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올 상반기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는 김위원장의 답방은 남북 관계는 물론 국내 정치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쪽은 아무래도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 강재섭 의원은 지난 2월9일 임시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여권이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이용해 헌정 질서를 변화시키려 한다는 설이 파다하다"라며 개헌음모설을 제기했다. 남북 정상이 이산가족 자유 왕래 등을 합의해 평화 분위기를 조성한 뒤 국가연합에 전격 합의할 것이고, 이를 계기로 개헌을 추진하리라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정치사를 장식했던 '북풍 전통'을 돌이켜 보면 야당이 '답방 이후'에 촉각을 곤두세울 만도 하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10월 유신의 빌미가 된 것을 시작으로 1987년 대선 때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 1992년 대선 때 남조선노동당 사건, 1996년 총선 때 판문점 충돌 사건, 1997년 대선 때 북풍 시도 사건 등 중요한 고비마다 어김없이 북한 변수가 등장해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쳐 왔다.

특히 여권은 최근 DJP 공조 복원, 안기부 자금 수사, 언론 개혁, 민국당과의 정책 연대 등 강성 일변도 정책을 펼쳐 왔다. 그 연장선에서 김위원장 답방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리라고 한나라당 사람들은 거의 확신하고 있다. 정형근 의원은 "지난해 6월 남북 정상회담이 4·13 총선용이었다면 이번 김위원장 답방은 차기 대선용이다"라는 말로 한나라당의 우려를 요약했다.

박관용 한나라당 의원은 이번 김정일 답방에 대해 "김대통령이나 김위원장 모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두 사람이 뭔가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미국 부시 행정부가 등장한 이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조정기에 접어든 상황이어서 김대통령이나 김위원장 모두 2차 정상회담에서 미국과 국제 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파격적 작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평화 문제에서 획기적인 진전이 있으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DJ는 지난 2월15일 통일부 업무 보고에서 "이번 2차 정상회담에서는 냉전 종식과 긴장 완화가 중심 의제가 될 것이다"라고 구상의 일단을 내비쳤다. 남한 정부가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해 '한반도 평화선언'을 제안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최근 일본을 방문해 남북 문제 전문가들과 두루 만나고 온 최병렬 한나라당 부총재는 김위원장이 휴전선에 전진 배치되어 있는 북한군 재래식 군사력을 후방에 배치하는 카드를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김위원장의 스타일로 볼 때 주한미군 문제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적 견해를 밝힐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김위원장 답방 때 군사 문제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 이루어지면 DJ의 햇볕정책은 일단 안정 궤도에 들어선다고 볼 수 있다. 일방적 퍼주기가 아니냐는 보수층의 비판을 어느 정도 잠재우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박관용 의원은 만일 김위원장이 휴전선 군사력을 후방으로 배치하겠다고 밝히면 한나라당도 더 비판만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내다보았다.

군사 문제와 아울러 2차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는 경제 문제가 되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특히 국내 경제의 어려움이 남북 관계를 포함한 모든 정책 추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경제적 기대감을 주는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그 효과는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개성공단 완전 개방과 오는 9월 경의선 개통 등이 국민들의 경제적 기대감을 부풀게 할 수 있는 사안이다.


야당, 남북 관계 틀이 '개헌'에 연결될까 노심초사



또한 이번 2차 정상회담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정례화한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남북 연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지난 2월22일 아태평화재단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미국 조지아 대학 박한식 교수는 정상회담 합의를 제도화해야 한다면서 낮은 단계의 국가연합으로 '범한국 조정위원회(Pan-Korea Coordinating Commission)'와 같은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위원장 답방 때는 어떤 식으로든지 남북 관계의 제도적 틀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한나라당이 특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안이다. 한나라당이 걱정하는 것은 개헌이다. 남북 정상이 남북을 아우르는 새로운 틀에 합의하면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야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영토 조항과 함께 권력 구조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리라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정치권 일각에서는 통일 추진 세력 결집을 명분으로 DJP 연합이 중심이 된 새로운 여권 신당이 출현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JP를 총재로 하는 이른바 'DJP+α'신당으로, 현재의 군소 정당과 한나라당 일부까지 포함하는 정계 개편 구도다. 최근 JP가 YS에서부터 김근태 민주당 최고위원에까지 보폭을 넓히고 있는 것이 새로운 주체 형성 과정을 주도하기 위해서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여권은 남북연합·개헌·정계 개편 같은 시나리오가 비현실적이라는 입장이다. 아태평화재단 김근식 박사는 2차 정상회담에서 남북연합을 합의하기는 무리라고 전망하면서 "제도적 틀을 만들기 전에 군사적 신뢰 구축과 남한 내부의 정지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남남 갈등이 여전한데 무리하게 남북연합을 추진하게 되면, 무리한 봉합을 시도해 혼란을 겪었던 예멘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것이다.

개헌 문제에 대해서도 한나라당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여권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민주당 장성민 의원은 "김위원장의 답방이 국내 정치에 미치는 파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망하면서, 답방 이후에 개헌 논의가 탄력을 받기는 하겠지만 한나라당이 1백33석을 유지하고 있는 현재 구도로 볼 때 개헌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여권의 한 인사는 "김중권 대표가 잘 나가니까 한나라당이 김중권-한화갑 정·부통령 카드를 우려해 개헌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 아니냐"라고 진단했다. 여권 신당과 관련해서도 "김위원장이 무슨 해결사라도 되느냐"라면서, 현재 여권이 지금의 판을 근본적으로 흔들 만한 힘이 없다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남북 문제에서는 상생 정치 펼쳐야"


한나라당은 음모설을 제기하며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마냥 수동적인 입장만은 아니다. 이회창 총재는 지난 임시국회 대표연설에서 김위원장 답방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고, 요청이 온다면 김위원장과 만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총재측은 답방 정국을 계기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그동안 남북 문제에서 문제 제기를 주로 해왔으나 김위원장과 회동하게 되면 이총재가 남북 문제 해결 역량을 갖춘 지도자라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당 외곽에 전문가들로 '답방 대책팀'을 구성하기도 했다.

미국의 부시 정권이 등장해 한반도 상황이 복잡해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남북 문제에서는 여야가 상생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여권이 남북 문제와 정권 재창출을 분리하면서 이총재가 남북 관계를 거들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이총재는 보수층을 설득해 초당적 차원에서 협력하는 모양새다. 김위원장 답방을 계기로 군사 문제 등 그동안 쟁점이 되어 온 문제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김위원장이 변할 가능성이 확인된다면, 여야가 초당적으로 협력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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